매일성경 묵상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_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행 14:1-18]
 – 2024년 05월 31일
– 2024년 05월 31일 –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나 이고니온에 도착한 바울과 바나바는 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한다. 청중의 반응은 비시디아 안디옥과 비슷했다. 허다한 무리가 믿기도 했지만, 적대적인 그룹들은 표적과 기사를 보고도 바울과 바나바를 돌로 치려 한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루스드라로 이동하여 복음을 전한다.
    
이고니온에서의 사역은 비시디아 안디옥과 비슷했기에 의도적으로 분량을 줄인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루스드라는 앞선 두 도시와 달랐다. 먼저 회당이 없었다. 그리고 이곳은 이 지역은 아나톨리아 원주민들이 사는 지역이었다. 앞서 복음을 전한 도시들이 로마의 지배하에 있고 헬라 문화를 공통으로 기반하고 있었다면 이전 도시들과 전혀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지역에서 사역한 것이다.
    
복음 선포의 중요한 패턴이 반복되는 것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복음은 언제나 듣는 자가 수용과 거절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거절이 몰고 오는 적대적인 반응과 폭력이 거세게 복음을 밀어내지만, 복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박해와 핍박에 밀려나며(?) 오히려 전진하고 있었다. 예루살렘 박해가 이방을 향한 복음의 결정적인 진보를 가져왔듯이 바울과 바나바도 역시 그와 비슷하게 진보하고 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적대적인 유대인들에게 밀려 이고니온으로, 이고니온의 적대세력에 밀려 루스드라와 더베로 복음 전도가 이어졌고, 가는 곳마다 주께서 친히 그 손으로 표적과 기사로 은혜의 말씀을 증언해 주신다.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제우스 숭배와 관련하여 환대와 같은 선행의 보상으로 풍작을 맛본다는 전설이 당시 부르기아, 비시디아, 그리고 루가오니아에 만연했다고 한다. 이에 바울과 바나바를 신격화해 숭배하는 무모한 행동이 자연스레 나온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무지한 행동을 막고, 오히려 이를 계기로 더욱 선명하게 복음을 전했다.
    
    
    
1. 이고니온에서의 복음 전파(1~7절)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다. “함께(카타 토 아우토)”는 “평소와 같이”로도 번역되었다. 두 사람이 유대인의 회당을 찾은 것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의 완악함으로 인해 이방인들에게로 선교의 방향이 바뀌었음을 선언했었는데(46절) 또다시 들어간 것이다. 두 사람은 여전히 유대인들에 대한 기대와 마음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는 결과로 나타났다(1절).
    
그러나 이곳에서도 순종하지 않는 유대인 무리와 맞닥뜨린다. 그들은 이방인들의 마음마저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에게 악감을 품게 했다(2절). “악감(카오코)”으로 번역된 단어는 “해하다, 비참하게 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두 사람이 겪은 일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런데도 두 사도는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였다(3절). 유대인들의 핍박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고니온에 계속 머무르며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들의 열정이 놀랍기만 하다. 한편으로는 발에서 티끌을 떨어버리기도 했으나 근본적으로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두 사람에게는 가득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말에 신빙성을 더하여 주기 위해 “표적과 기사”로 개입하여 주셨다. 표적과 기사의 내용이 무엇인지 기록하지 않았으나 이에 따라 두 사람이 전한 하나님 나라 복음의 말씀을 증언하는 역할을 했음을 분명하게 기록한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복음의 능력으로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나, 표적과 기사가 말씀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한편 1절과 4절에서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라고 지칭한다. 이점이 매우 흥미로운데, 엄밀한 의미에서 두 사람은 예수의 직전 제자들이 아니다. 좁은 의미로는 그들이 사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바울의 사도권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누가’는 두 사람을 사도라고 칭한다. 사도행전 13:1에서는 “선지자 혹은 교사”로 칭하기도 했다. 교회의 직제가 아직 확고하게 구분되지 않았던 시기에 기록하였기에 나타난 현상이다. ‘누가’는 직제(office)보다 기능(function)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한 듯 보인다.
    
복음에 대한 반응은 언제나 두 가지이다. 복음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복음을 대적하게 된다. ‘누가’는 이고니온에서 무리가 나뉘었다고 말한다(4절).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이 전한 복음을 대적한다. 이러한 현상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상기 기켜준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복음 앞에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한 기적과 표적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의 마음을 녹이고 무너뜨리는 것임을 깨닫는다. 5절은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이 얼마나 적극적이고 적대적인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사도들을 모욕했을 뿐만 아니라 돌로 치려 했다. “모욕하다(휘브리사이)”로 번역된 단어는 “매우 오만하고 무례한 태도로 누군가를 대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누가복음 18:32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묘사할 때, 마태복음 22:6에서 혼인 잔치를 열고 사람들을 청한 주인이 자기 종을 모욕하고 죽였던 사람들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누가’는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복음 전도의 여정에서 당하는 환난과 박해를 곧 예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2. 루스드라와 더베에서의 복음 전파(8~18절)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의 선교는 초자연적인 치유사역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치유사역만이 아니었다. 표적과 기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말씀을 전하기 위한 보조적인 도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루스드라에서도 치유의 기적에 우선하여 복음 선포가 있었다(7절).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던 사람에게 바울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알아차렸고, 큰 소리로 명령하여 그 사람을 고친다.
    
이 기적은 의도된 것이 아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그는 마음에 가지고 있던 구원에 대한 열망에 바울이 적극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7절은 이 믿음이 어디에서 왔을지 짐작하게 하는 표현이 있다. “줄곧 전하는 복음(새번역_7절)”에 그의 마음이 반응한 것이다. 비록 문맹률이 높은 당시였고, 미신적인 환경에 쉽게 노출되어 있을지라도 복음은 듣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을 갖게 하였다. 9절은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이라고 더욱 확실하게 증거한다. 그렇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바울이 행한 기적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진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착각하였다. 그를 섬기려고 제사하려 했다. 11절은 루스드라 사람들이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를 질렀다고 기록한다. 이 지역은 아나톨리아 원주민들의 거주 지역으로 헬라어가 사용되지 않은 지역이다. 지금까지 헬라어가 통용되던 지역에서 선교사역을 해왔음을 감안하면 당연히 복음 선포도 헬라어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 기적의 결과는 헬라어를 모르는 원주민들에게는 바울과 바나바가 사람의 모습을 한 신들의 방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게 한듯하다. 그들은 열렬히 두 사도에게 제사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하지만 14~18절까지 바울과 바나바가 매우 신속하게 옷을 찢으며 그 무리 가운데로 뛰어들어 그들을 제지하였다. 그리고 치유의 능력은 자신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분명하게 설교한다. 루스드라 사람들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이 오히려 바울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다시 한번 제대로 설명할 기회를 얻도록 하였다. 14~18절의 바울 설교는 유대인이 아닌 순수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달했는지를 알게 해주는 최초의 설교로 볼 수 있다.
    
    
    
나는?
-복음은 늘 영접과 배척, 두 반응으로 나타난다. 이고니온에서도 복음에 대해 영접과 배척의 반응이 모두 나왔다.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여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였음에도, 자신들이 순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형제들을 선동하여 악감을 품게 하고, 나중에는 모욕하고 돌로 치려고까지 하였다. 모든 이들이 다 환영하는 복음은 없다. 불화와 분리를 낳지 않는 복음도 참 복음이 아니다(눅 12:51~52). 염려해야 할 것은 복음이 낳는 불편한 분리가 아니라 두루뭉술한 복음으로 감춰진 거짓 일치가 아닐까?
    
-어떤 이들에게는 살 소망을 주는 복음이, 또 다른 이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어 악감을 일으킨다(1~2, 5~7절). 하지만 이에 따라 받는 모욕을 대할 때마다, 복음에 대한 반대로 겪는 박해는 이미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이고, 스데반이 보여준 길이기도 했다. 바울과 바나바도 이것을 마땅한 일로 알고 예수님의 말씀대로(마 10:23) 돌을 던지는 이들을 뒤로한 채 성령께서 이끄시는 새로운 곳으로 떠났다.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반대하는 이들이 있어도 주께서 허락하시는 동안까지 주의 도우심을 힘입어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다. 여러 반대와 위협으로 인해 그들은 다른 지역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것은 도주가 아니라 새로운 사역지로의 이동이었다. 사역의 성공은 복음을 수용하는 자들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다. 고난이든지 형통이든지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반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담대하게 말씀을 증거하는 사도들에게 “표적과 기사”를 행할 능력으로 함께 하신다(3절). 이를 통해 은혜의 말씀을 눈으로 확인하게 해주신다. 전하는 사람이나 기적은 모두 이 은혜의 말씀의 진실성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다. 나의 사역에서도 하나님과 은혜의 말씀이 더 잘 드러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믿음이 기적을 일으켰다(8~10절). 바울과 바나바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을 통해 자기 능력을 보이신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며 걷는 걸음 속에서 믿음으로 말씀을 붙잡을 때 하나님 능력의 손이 함께 하실 것을 믿는다.
    
-바울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자가 말씀에 청종하는 모습을 보고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베드로처럼(행 3장) 그에게 단지 일어나라고 명령만 하여 걷게 하였다. 오늘도 단지 기적만을 좇는 신앙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믿는 믿음을 갖는다면, 하나님은 주저앉아 있는 상태에서 충분히 일어나게 하실 것이다.
    
    
-사도행전 12:23에서 헤롯은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추앙하는 백성의 거짓 환호에 교만하여 죽음의 심판을 받았으나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만 누리실 수 있는 영광을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 도리어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멈추고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기회로 삼았다. 박해만큼이나 자기 우상화의 유혹은 복음 증거자들을 넘어뜨리는 사탄의 강력한 무기다. 나의 눈을 가리고 귀를 어지럽히는 과도한 칭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자신들이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을 우상숭배라는 “헛된 일”에서 돌이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기회로 사용하였다. 기억하리라. 내가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을 높일 때, 세상도 하나님만이 우리가 경배하고 칭송하며 감사해야 할 유일한 분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직 듣지 못한 자들의 무지에 대해 오래 참아주신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때에 맞는 비와 풍성한 결실을 통해 기쁨과 만족을 얻게 하셔서 창조주 하나님을 깨달아 알 기회를 주셨다. 어느 한 세대도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서 제외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것을 핑계할 수 없다(롬 1:20). 구속의 은총뿐 아니라 모든 일상에서 비추시는 은혜의 빛 아래 살아가리라.
    
    
    
*주님, 복음의 말씀, 은혜의 능력으로 보증해 주는 역사, 더온누리 공동체에 이와 같은 말씀의 역사가 풍성하기를 고대합니다.
*주님, 오롯이 말씀만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목회의 여정이 되기를 결심합니다.
*주님, 믿음이 통로 되어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가 구현되었음을 봅니다. 나의 믿음도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로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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