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5장은 사도행전의 정중앙에 있다. 구조적인 측면뿐 아니라 내용에서도 중요하다. 본문은 예루살렘 공회가 모이게 된 과정과 베드로의 연설이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당연해질 무렵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심각한 질문에 직면한다. “유대인이 되는 과정과 규례를 지키지 않고도 이방인들이 초대교회의 신자가 될 수 있는가?”
초대교회가 이방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인 기록을 ‘누가’는 사도행전 15장 이전에 세 차례에 걸쳐 언급했었다.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의 회심 이야기(행 10:1~11:18), 수리아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진 이야기(행 11:19~30), 바울과 바나바의 첫 번째 선교 이야기(행 13:1~14:28)이다. 이제껏 이방인의 회심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초대교회에 최초로 신학적인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방인 신자들을 교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때 할례와 율법의 행위들이 필요한지에 대한 논쟁이었다.
1. 유대주의자들의 도전(1~2절)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여행의 성공적인 보고를 받은 후 은혜 가운데 있었던 안디옥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교회가 확장되면서 예기치 못한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문제가 이방인들의 입교와 관련된 “율법의 준수 여부”였다. 소위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이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안디옥 교회를 심각하게 뒤흔든다. 그들의 정체가 누구인지는 ‘누가’가 밝히지 않는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초대교회 전체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교회와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다. 이로써 안디옥 교회 안에서 있었던 논쟁이 초대교회가 반드시 다루어야 하는 중요한 신학적인 문제로 주목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안디옥 교회의 대처 모습은 매우 긍정적이다. 먼저 안디옥 교회는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복음의 핵심적 가치를 지키려는 수고를 기꺼이 감내하였다. 또한 소위 유대주의자들로 밝혀진 사람들이 제기한 신학적인 문제를 교회공동체 전체의 논의를 통해 함께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다. 안디옥 교회가 내부 문제로 여겨 충분히 자체적으로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지만, 결코 교만하거나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의 권위를 존중했고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려는 수용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
안디옥 교회의 이런 모습은 교회 운영의 바람직한 모델을 제공한다. 교회의 하나 됨은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자세에서 시작된다. 배려와 존중은 교회와 교회들 사이의 모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할 가치다.
2.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다(3~5절)
바울과 안디옥 교회의 대표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여정이 흥미롭다. 그들은 남쪽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베니게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을 택한다. 이 길은 안디옥에서 예루살렘까지 일직선으로 약 400km에 달하는 긴 여행길이었다. 복음의 본질을 다루는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긴 여정의 중간중간의 그리스도인들을 방문하여 하나님의 은혜 역사를 나누고 함께 기뻐하면서 그들을 격려한다.
이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선교의 열매들이었기에 바울 일행은 그들 역시 격려하기를 원한 것이다. 3절의 “다니다(디에르콘토)”라는 미완료형으로 반복적으로 계속된 행위를 나타낸다. 바울과 그 일행이 베니게와 사마리아 지역의 성도들을 만나기 위해 계속해서 돌아다녔음을 의미한다. 바쁘고 힘든 여정이었고, 특히 앞으로 신학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를 다루어야 할 영적인 긴장감 속에서도 은혜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백성된 성도들과의 만남은 양쪽 모두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예루살렘에서 환대와 냉대를 동시에 맛보아야 했던(4~5절) 바울과 일행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으로 충분하다는 자신들의 믿음과 확신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님을 먼저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비록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은 환대와 냉대가 교차한다. 공동체의 사랑 연합은 그 삶을 살아가게 하는 중요한 원동력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삶을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교회를 향해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라고 교훈했다.
3. 베드로의 연설(6~11절)
본 단락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의논하는 장면, 그리고 베드로의 연설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6절은 예루살렘 교회가 이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다루었는지를 보여준다. “사도들과 장로들”, 즉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머리를 맞댄 것이다. “사도와 장로들”에 대한 언급은 2절, 4절, 6절에 연이어 나온다. 4절은 바울과 일행을 환영하면서 예루살렘 교회가 다 함께 환영했음을 보여주고, 2절과 6절에서는 이방인들의 입교에 대한 문제를 교회의 지도자들이 먼저 논의했음을 보여준다. 교회 안에서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일과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구분하여 감당한 것이다.
7~9절은 베드로 연설의 첫 번째 부분으로 그의 경험에 기초한 진술이 포함되어 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유대교의 율법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세 가지이다. 먼저 첫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자신이 사용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이방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오랜 계획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라고 표현하지만, 베드로는 자기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신다고 확신한 것이다. 둘째,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성령을 부어주셨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성령의 임재를 통해 확인했었다.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의 회심은 하나님이 주도하신 일이었다.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듣게 하셨으니, 아무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이 베드로의 결론이었다.
10~11절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논지를 더욱 강화한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에게 다시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며, 유대인들도 메지 못하는 멍에를 지우는 일이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제 율법과 복음은 양립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나는?
*구원을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에서 온 사람들 때문에 안디옥 교회에는 큰 변론과 다툼이 벌어졌다(1~2절). 이것은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결과는 물론이고 할례 없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안디옥 교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충격적인 주장이었다. 바울은 그들과의 다툼과 변론을 마다하지 않았고 예루살렘 교회가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어 주기를 요구했다. 이에 교회는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나름의 단호하고도 진지한 노력을 기울인 후, 더 권위적인 사도들 공동체에 이 문제를 의뢰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을 파송하기에 이른다.
*오늘날도 교회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거짓 가르침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을 좀먹는 세속 문화가 교회 안에 난무한다. 우리 공동체는 이럴 때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되어 진지하게 대응하고 있는가? “그런데 우리가 정말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1절,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모세의 법(에도스)”으로 번역된 단어는 “관례, 관습”으로 번역해야 맞다. ‘관례’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 총 14회 사용되었고 2회를 제외하고 모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사용되었다. 관례는 법보다 훨씬 더 약한 의미이다. 예수님의 구속 이전에 할례는 하나님 백성으로 소속되는 유일한 언약 의식이었다. 하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할례는 이러한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제에 있어 할례의 유무는 철저하게 유대인의 관례와 관습일 뿐이었다. *혹시 우리 공동체안에 고집하고 있는 관습은 없을까? 말씀의 가르침보다 관습을 더 고수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의 관습이 만약 복음을 듣는 이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데 장벽이 된다면 그것은 위험한 관습이다. 초대교회는 유대인의 관습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큰 변론과 다툼을 가져왔다. 우리가 익숙한 어떤 것이라도 공동체 안에서 불편함이나 장벽으로 다가온다면 그것은 진리 안에서 진지하게 점검해 보아야 할 것 아닐까?
*복음은 소외된 자들을 위한 것이다.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하려고 가는 도중에도 베니게와 사마리아의 교회를 방문하여 선교 보고를 한다.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문이 열렸다는 소식이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근심이 되었지만, 천대받던 지역의 성도들에게는 큰 기쁨이 되었다.
*바울 일행은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이뤄내신 이방 선교 여정을 베니게와 사마리아 사람들과(3~5절) 예루살렘 사도들에게(10절) 소개한다. 그 일에 대해 바리새파는 할례와 율법 준수의 필수성을 강변했으나, 베드로는 바리새파의 주장을 조상들도 능히 감당하지 못한 멍에로 묘사한다. 예수님 구속의 충족성과 완전성을 훼손하는 그 어떤 요구 사항도 하나님의 구원 은혜를 시험하는 일이 될 것이다.
*복음은 배제와 차별이 없다.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은 차별이 없는 복음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자신을 택하여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여 믿게 하신 일에 주목한다.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에서 중요한 지도자인 자신을 통해 이방인 선교의 문을 여신 것은 자신을 연합의 가교로 삼으시려는 뜻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받는 일에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하나님은 차별하심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 믿음으로 마음을 깨끗하게 하셨고, 모두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하셨고, 모두 똑같이 성령을 주셨다. 그밖에 더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일 뿐이다.
*하나님은 바울뿐 아니라 베드로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믿게 하는 일에 부르셨다(7절). 사도들의 대표격인 베드로를 통해 최초로 이방인인 고넬료의 회심을 주도하게 하셔서 바울의 본격적인 이방인 사역을 준비하고 지원하게 하셨다. 이방인의 구원 사역을 보증하게 하시려고 베드로에게 미리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하신 것이다. 내가 어떤 일에 주인공이 되지 않더라도, 누군가를 돕고 섬기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앞서 경험하게 하신 일이 없었는가?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원 얻는 길에 차별을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8~9, 11절).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인간에게는 전혀 구원받을 길이 없고 오직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하시고 성령을 부으셔서 마음을 깨끗게 해주셔야만 가능하다. 하나님이 차별하시지 않는 자를, 온갖 이유를 대며 차별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주님, 구습과 전통에 얽매여 오직 은혜로 구원하신 아버지의 뜻을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차별 없이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올곧게 전하고 그 안에 머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