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아덴에서의 전도_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 [행 17:16-34]
 – 2024년 06월 07일
– 2024년 06월 07일 –
바울의 유명한 ‘아레오바고의 설교(22-31절)’를 포함하는 아덴에서의 사역을 소개한다. 바울의 설교는 타문화권 선교에 있어서 어떻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좋은 모델이다. 그리고 아덴 사람들이 자랑하던 철학을 통해 복음을 변증한 좋은 예이다. 또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을 넘나들면서 그들로 하여금 영적인 무지함을 스스로 깨닫게 하였다. 또한 헬라적인 개념을 사용하면서 매우 조심스럽게 복음을 전달하였다. 
 
아레오바고의 설교는 이방인들을 향한 바울의 온전한 설교문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바울 설교의 핵심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었다. 그런데 아덴은 그리스 철학의 본산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특히 그리스 철학이 추구하는 영혼에 대한 개념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전하는 부활이라는 개념은 아덴 사람들의 반응을 집중하게 하였다. 그들은 이 개념을 한 번도 접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의 일반적인 영혼관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지하세계로 내려가고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타문화권에 대한 선교적인 접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하는 본문이다. 이런 모습에서 보이는 바울의 선교전략은 선교 대상에 따라 선교 방법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유대인에게는 회당에서 변론하고, 철학자들에게는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몸의 부활 교리를 선포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1. 바울과 아덴(16~21절)
바울은 홀로 아덴에 먼저 도착한다. 그러나 아덴의 영적인 상황은 그를 분노하게 한다. 우상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런 참담한 영적 상황에 대한 바울의 분노는 복음을 전하는 열정으로 이어졌다(17절). 먼저 회당에 들러 유대인들을 만나 설득하고 이후에는 회당과 장터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서 날마다 변론하였다. “날마다”라는 표현은 바울이 얼마나 선교에 전념하였는지 보여주는 표현이다. 
 
바울의 논쟁 대상은 주로 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이었다(18절). 두 학파는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철학사조로 알려져 있는데, 바울은 그들의 자연관, 우주관, 신관 등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지적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가?”하고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말쟁이”는 새가 모이를 주워 먹듯이 이야깃거리를 모으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자기도 모르는 말들을 떠들어 대는 웅변가를 가리키기도 한다. 또 그들은 바울이 외국의 신들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한 이유이기도 했다. 호기심 많은 철학자들은 바울과 논쟁한 후 그에게서 더 자세한 것을 듣기 위해 아레오바고로 데려간다(19~20절). 
 
아레오바고는 법정이 아니라 다양한 민간 활동들이 이루어지는 공의회 같은 곳이다.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알고자 하노라”같은 표현을 통해 강압적인 분위기보다 예의를 갖추어 바울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바울을 새로운 교리, 새로운 종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아덴 사람들의 이런 호기심 때문에 아레오바고의 설교가 전개될 수 있었다. 아덴 사람들은 나그네된 외국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의 선교에 단순히 호기심을 넘어 호의를 보이고 있음을 누가는 평가한다. 
 
 
 
2.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12~31절)
그의 설교는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서언(22~23절), 제사가 필요 없는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24~25절), 사람들에게 계시되신 하나님(26~27절). 우상숭배 금지(28~29절), 종결부분(30~31절)이다. 아레오바고의 설교는 철학적이고 논리적이면서 감동적이다. 먼저 아덴 사람들의 호기심에 답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들이 가진 종교심을 칭찬한다. 바울은 아덴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을 설교 전개의 실마리로 삼는다. 이방인들이 알지 못하고 섬기는 그 대상을 선포하여 알리려 하는 것이다. 참고로 “알게 하리라(23절)”를 직역하면 “선포하다(카탕겔로)”의 뜻이다. 이를 통해 바울의 설교가 그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겠다는 의지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바울의 설교는 세 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시다. 만물의 근원에 대한 관심이 가득한 사람들에게 그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선포한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26절). 바울은 인간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셋째, 하나님과 사람은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는 충분히 주어졌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촉구한다. 
 
모든 것을 만드신 신의 개념은 행 4:24에 등장한다. 또 “만드시는 분”이라는 개념도 행 14:25에 나온다. 행 7:48의 스데반 설교에서 제시된 본문 24절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와 같은 표현을 통해 하나님은 만유와 만인의 하나님이시지만 유대인과 같은 특정 민족의 하나님으로 강조되지 않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보편적인 하나님으로 제시된다. 
 
만유, 만인과 같이 “모든”이라는 헬라어 표현이 본문에서만 24, 25, 26, 30, 31절에 나온다. 하나님의 자기완결성과 완전함을 강조하고(25절), 인간이 사는 시간적 연대와 공간적 영역을 결정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밝힌다. 바울은 이러한 창조의 목적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려는 데 있다고 선포한다(27절).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셨다는 뜻이다. 바울은 주전 6세기 시인 에피메니데스의 싯구를 인용하여 우리는 신의 소생으로서 그 신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고 선언한다. 
 
29절은 설교의 결론부분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라고 당부하면서 자신이 믿고 전하고 있는 참 하나님을 그들이 바르게 인식하고 믿기를 바란다. 아덴 사람들은 이 “하나님”을 “신”이라는 말로 들렀겠지만, 바울은 여호와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30~31절은 과거 무지의 시대에 하나님은 지나치셨으나, 오늘은 회개하라고 명령하시며, 내일은 심판 하실 것임을 선언한다. 이 심판의 확실한 근거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제시한다. 
 
 
 
3. 아덴 사람들의 반응(32~34절)
바울의 설교에 아덴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뉜다. 부활에 대한 바울의 언급이 아덴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바울은 그들에게 조롱을 당하였다(32절).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관심을 보였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바울을 따라가 회심의 은혜에 동참하게 된다(34절 :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 하여 믿으니). 그 가운데 아레오바고의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여인의 이름이 언급된다. 교부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디오누시오는 후일 최초의 아덴 감독이 되었다.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이 행한 설교는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복음적인 설교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큰 도전을 준다. 바울이 청중의 욕구를 잘 분석한 설교 진행이 돋보이고, 그 시대의 종교적인 면과 문화적인 면을 통합적으로 잘 이해함으로서 청중과의 접촉점을 찾았다. 그리고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그들을 초대하는 길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된다. 
 
오늘도 깨닫는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복음전도자들은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할 뿐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할 때는 올바르게 전해주어야 한다. 반응에 상관없이 그리해야 한다.
 
 
 
나는?
-바울이 우상숭배에 대하여 매우 분노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소생이며 그분을 힘입어 살고 기동하며 존재하는데도 아덴 사람들이 자신을 창조하신 이를 금이나 은이나 돌이나 사람이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기는 것을 보고 분노한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눈먼 이들을 향한 안타까움과 연민의 감정에서 비롯된 “거룩한 분노”였다. 그런데 이 분노에서 복음 전도의 열정이 나온다. 
 
-그럼에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듣는 청중들을 존중하고 배려했다. 바울은 회당에서는 유대인에게 장터에서는 철학자들을 포함하여 이방인들과 변론하여 예수와 부활을 전하였다. 특히 종교성이 많은 아덴 사람들의 성향과 육체와 물질적인 삶을 경시하는 헬라 철학을 잘 파악한 후 창조 세계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헬라 철학자들의 시 속에 담긴 진리의 요소를 사용하여 복음과의 접촉점을 만들어 갔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예수와 부활을 증거하였고,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예수)을 통해 회개 하지 않는 자들을 반드시 심판 하실 것을 분명하게 선포한다. 소신껏 진리를 진리답게 전하되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전하는 그의 모습이 도전된다. 
 
-아덴 사람들에게 복음은 지적 호기심에 불과했다. 자신들의 존재의 시작과 의미를 규명해 줄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권태와 무료함에 빠져서 자기 귀와 이성을 즐겁게 하는 새로움만 추구하고 영적으로는 황폐하여 우상숭배에 탐닉하는 자들이었다. 이로 보건데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평안도 없고 만족도 없음을 알게 된다. 
 
 
*바울은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을 상대하고, 장터에서는 만나는 사람과 매일 변론하였다(17절).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다. 믿는 사람들과만 어울리는 소극적이고 협소한 관계로 물러설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웃을 향해 긍휼한 마음으로 나아가 생명의 복음을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을 지으시고 역사를 주장하셔서 사람이 자신을 찾아 알도록 계시하는 하나님이시다(26~27절). 지금은 예수님과 말씀을 통해 더 가까이, 더 친밀하게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뵐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 우리가 날마다 시간을 정하여 갖는 “묵상”은 이 하나님을 생생하게 만나서 교제하는 통로이다. 이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이 복된 시간을 함께 하도록 시도하는 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우리 산 자들을 지으신 분이시니, 금이나 은이나 돌로 만들거나 새길 수 없는 산 인격의 하나님이시다. 인격적인 하나님은 생명과 복을 주시지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는데도 저버리고 우상을 택하면 정한 날에 정한 이(예수)를 통해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잊으면 안 된다. 
 
 
 
 
*주님,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를 통해 진리의 말씀을 듣는 대상에 따라 어떻게 전하여야 하는지를 깨우침니다. 저에게 맡겨주신 말씀도 청중에 따라 공감은 하되 진리의 말씀대로만 전하겠습니다. 
*주님, 복음을 전하는 삶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지금 열어주신 상황에 집중하며 드러내겠습니다. 예배당에서든지, 일상의 현장에서든지 가리지 않고 전하라 하실 때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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