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행 21:1-16]
 – 2024년 06월 16일
– 2024년 06월 16일 –
바울이 밀레도에서 고별설교를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을 속도감 있게 기록한다. 밀레도에서 두로(1~6절), 두로에서 가이사랴까지(7~9절) 각 지역의 형제들을 섬기며 예루살렘으로 나아간다. 이 여정 속에서 “제자들(4절), 빌립의 딸들(8~9절), 선지자 아가보(10절)”는 큰 어려움이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기다리고 있다고 예언한다. 이에 동료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지 않기를 요청하지만, 바울은 예수의 이름을 위해 기꺼이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한다.
    
바울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은 여러 부분에서 예수님의 여정과 유사하다(눅 9:34과 행 21:4, 눅 18:31과 행 21:11~13). 바울은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이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여정을 떠올리게 하는데,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바울이 실제로 죽고 부활하지는 않았으나 예루살렘과 로마로 가는 항해에서 죽음과 같은 시련을 겪는다. 바울은 거절당한 예수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과정에서 배척당한다. 증인의 길은 고통의 연속이지만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행 21:14).
    
    
    
1. 밀레도에서 두로까지(1~6절)
바울 일행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작별하고 배를 탄다. 고스와 로도를 거쳐 바다라에 이르고 거기서 베니게로 가는 배를 타고 구브로를 지나 두로에 도착한다(1~3절). 약 3일~5일이 소요된 여정이었다. 가이사랴로 가는 중간에 두로에서 한 주 동안 제자들을 방문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짐작하기는 바다라에서 두로까지의 거리가 짧았기에 제자들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듯하다.
    
제자들은 성령을 통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가 예루살렘에 가지 않도록 설득한다(4절). 선교팀이 두로 일정을 마치고 떠나려고 할 때, 제자들과 그들의 아내들, 자녀들이 도시 밖까지 나와서 바닷가에서 환송했다(5절). 바울의 이동 속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을 돕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바울이 두로에서 일주일을 머문 것도 그곳에 있는 제자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도왔을까? 역시 말씀으로 도왔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적인 사람들로 교육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누가’는 이와 함께 선교팀을 환송하는 교회의 모습도 생생하고도 감동적으로 묘사한다(5~6절). 제자들과 온 가족이 성문 밖까지 나와서 환송하며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예전에 우리의 모습이 생각난다. 선교사를 파송할 때 공항까지 가서 환송하며 간절히 기도해 주었다.
    
특히 요즘은 교회들이 선교사 선교 보고를 꺼리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우리 공동체는 그렇지 않지만, 선교사 선교 보고가 광고되면 예배 참석률이 떨어지는 현상까지 나온다. 하지만 우리 공동체는 이런 흐름을 타지 않으면 좋겠다. 예배에서 선교에 관한 보고를 듣거나 교회의 소식지로 접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복음의 최전선에 있는 선교사의 사역을 위해 온 공동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동참해야 하리라.
    
    
    
2. 두로에서 가이사랴까지(7~12절)
두로를 떠난 선교팀은 지중해 연안의 남쪽에 있는 돌레마이에 도착한다(7절). 이곳에도 믿음의 형제들이 있었고 하루를 머문 뒤 다시 남쪽으로 향하여 가이사랴에 이르게 된다(8절). 가이사랴에서는 빌립의 집에 머문다. 빌립에게는 결혼하지 않은 딸 네 명이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예언하는 은사를 받았다.
    
선교팀이 빌립의 집에 머무는 동안 유대에서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왔다(행 11:27~30). 아가보는 바울의 띠로 자기 손과 발을 묶고는 성령이 주시는 말씀을 전한다(11절). 성령의 말씀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은 띠의 소유자를 결박하고 그를 이방인들의 손에 넘길 것이다. 이 예언대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재판받기 위해 구금을 당하는데, 구금에 이르게 한 책임은 유대인들에게 있었다(21:27, 30, 33). 아가보의 더 생생한 예언을 들은 선교팀과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 것을 요청한다(12절). “권하다(파라칼레오)”는 “애원하다, 간구하다”라는 의미도 있고, 무엇보다 시제가 미완료 과거형인 것을 감안하면 그들의 간청이 끈질기고 간절했음을 알 수 있다.
    
성령은 빌립의 딸들에게 말씀하셨고, ‘누가’는 그들의 예언이 틀렸다고 기록하지 않았다. 예언하는 선지자 아가보는 바울의 띠를 자기 손발에 묶고 예언하는데, 바울의 띠(전대)에는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헌금도 들어 있었다. 아가보의 행동이 다소 강렬해 보일 수 있지만, 바울이나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 예언의 내용을 인정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최고로 존경받는 지도자였다고 해서 그를 통해서만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자기 핍박의 내용을 예언하는 형제와 자매를 인정하고 존중하였다. 오늘날 교회의 직분을 내세워 자기 생각이 성령의 뜻에 더 가깝다고 주장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자신의 직분이 높다고 착각하는 이는 상대방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성령께서는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신다.
    
    
    
3. 고난이 있더라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바울(13~16절)
바울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울면서 호소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는다(13절). 그러나 자신이 예수의 이름을 위해 결박당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에 따른 핍박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순교하는 것도 각오한다. 바울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경주를 신실하게 마칠 마음을 먹고 있다. 바울의 결심이 단호한 것을 알게 된 선교팀은 더 이상 그를 설득할 수 없음을 알고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다(14절). 이 표현은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와 같고,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과도 같다. 선교팀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오직 주님의 뜻이다. 며칠 후 바울 일행은 드디어 예루살렘을 향해 이동한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은 하룻길이었다. 가이사랴의 제자 중 몇 명이 동행했고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나손이라는 제자의 집에 머문다(16절).
    
본문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첫째, 성령을 통해 일어날 일을 알게 되더라도 가야 할 길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때로는 본문처럼 성령이 미래에 벌어질 상황을 예상하도록 하신다. 그때 제자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바울은 자신을 염려하는 형제들의 사랑으로 마음이 찢어졌지만,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이 가야 할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고난을 겪더라도, 심지어 죽을지라도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경주라고 믿는 바울의 결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우리는 예수를 고난받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메시아로 믿고 전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고 전하는 예수의 길을 가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에게 선택의 순간이 주어진다면 어떤 쪽을 선택할까?
    
둘째, 성령의 뜻을 따르는 공동체는 다양성과 일치성을 보인다. 바울의 동료들은 반복되는 예언으로 최대한 바울을 설득한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고난의 길을 가겠다는 바울의 결심을 존중한다. 그들은 핍박이 있다는 것도 성령의 뜻이고,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 기꺼이 핍박받겠다는 바울의 결정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인정한다. 무엇보다도 성령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겪을 어려움을 계시하셨지만, 바울이 그곳에 가지 못하도록 막으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난을 회피하지 않는 바울의 결정을 존중한다. 그리고 바울의 결정을 주의 뜻으로 인정하기에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홀로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성령은 구원받은 성도 개인에 내주하시므로 저마다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려는 공동체는 가야 할 방향이 하나로 결정되면, 한마음으로 예수의 이름을 위해 순종해야 한다. 나의 뜻이 관철되는 것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은 고난의 길을 가려는 자의 결정을 무시하고 외면하려 한다. 그렇다면,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 힘든 길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걷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진심으로 격려하고 그와 함께 성령의 길을 걸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바울의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길은 성도를 보살피는 길이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두로와 돌레마이, 가이사랴를 들렀다. 가는 곳마다 단 하루라도 틈을 내어 형제들을 만나 교제하였다. 항상 만날 수 없고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들은 늘 바울의 영적인 자녀였고 동료들이었다. 바울은 그런 성도들을 찾아 만났고, 성도들은 그런 바울의 안부를 걱정하고 그를 위해 기꺼이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관계인가?
    
-어디를 가든지 수소문하여 제자들을 찾고, 또 말씀으로 권면하여 그들을 굳게 세워준다(1~4절). 우리 공동체는 어떠한가? 피차 말씀 안에서 서로를 찾아 위로하는 그런 교제(롬 1:12)가 우리에게 있는가? 또 두로의 형제들과 작별하는 모습은 너무도 특별하다. 그 모습은 마치 에베소의 장로들과 작별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우리 공동체는 이렇게 말씀 안에서 따뜻하게 격려하고 기도해 주는 공동체로 서 있는가?
    
-바울이 가는 곳마다 형제들은 예루살렘행을 만류한다. 성령에 감동하여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환난과 결박을 당할 것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에게도 “각 성”에 이를 때마다 알려 주셨었다(행 20:23). 하지만 이것은 그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지 그의 길을 가로막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꼭 순탄하고 순조로워야 주의 뜻인 것은 아니다. 복음이 있는 곳에 고난은 반드시 있을 것이니, 인내하고 오래 참아야 하고 목숨까지도 드릴 각오를 해야 한다(계2:10).
    
-참믿음은 고난 없는 삶을 구하기보다 고난 속에서도 주의 뜻이 이뤄지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지도자를 사랑하고 진심으로 염려하는 마음은 나무랄 수 없지만,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나라보다 앞서서는 안 된다. 바울은 그래서 뻔히 알고 있는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
    
-특히나 전도자 빌립과의 만남은 바울에게 특별했을 것이다. 바울이 여러 날 빌립의 집에 머물면서 과연 어떻게 시간을 보냈을까? 아마도 십수 년 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각자가 그 일에 대한 시각이 달랐지만, 결국 예수 안에 있는 현재의 모습은 뜻깊은 나눔이 되었을 것이다. 또 지나온 시간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복음을 증거했던 놀라운 일들을 나누었을 것이다. 그런 복음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할 이유가 더욱 선명해졌을 것이다. 예루살렘에 올라갈 마음의 준비가 더욱 단단하게 자리매김하는 시간이었다.
    
-바울은 한 치의 주저함이나 흔들림도 없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화해시켜 새 이스라엘 공동체를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전하는 사명을 위해서라면, 고난과 결박뿐 아니라 죽음까지 각오했기 때문이다. 고난을 외면하는 교회를 향한 냉소를 이기는 길은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사명이 부르는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향한 염려에 감사하면서도 그들의 바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바람에 따라서만 움직인다. 한 치의 주저함이나 흔들림도 없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바울은 사명이 부르는 그곳으로 올라가는 소명의 사람이었다. 결박이든 죽음이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충만한 그에게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심지어 죽는 것일지라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바울의 모습이 거대하다! 바울은 성령을 통해 두로에 있는 제자들, 가이사랴에서 아가보를 통해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을 미리 보았다. 이는 성령께서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울이 당할 일을 미리 보여주셔서 그의 마음을 준비시켜 주신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께서는 여러 모양과 여러 경로를 통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을 받아야 할 것이다.
    
    
    
*주님, 성령이 다양하게 알려주시는 것은 결국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통로로 고난이라도 감당할 준비를 하라는 배려임을 깨닫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받는 고난이 언제나 우리 앞에 있음을 알게 하셨으니 담대하게 되려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며 꿋꿋이 걸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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