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나의 복음_예수님을 만나기 전, 예수님을 만난 그때 [행 21:37-22:11]
 – 2024년 06월 19일
– 2024년 06월 19일 –
바울이 자신을 죽이려는 무리 앞에서 변호한다. 본문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이야기까지 다룬다. 바울은 천부장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반란자가 아님을 확인시켰다. 박해자로 지냈던 시절과 회심한 사건을 설명하며 자신은 신실한 유대인이며 자신을 이끄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한편 천부장은 바울을 애굽 출신의 반란자로 오해했음을 알 수 있는, 요세푸스는 이에 대한 간단한 기록을 언급한다(유대전쟁사 2.13.5,5와 유대고대사 20.8.5). 거짓 선지자 한 명이 애굽에 등장해서 삼천 명을 모아 그들을 이끌고 광야를 지나 감람산으로 가서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릴 것을 예고하였다. 그는 성벽이 무너지면 도성에 들어가 로마 군대를 격퇴하고 백성을 통치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후에 로마의 군대가 감람산에 있던 그를 공격하자 그가 탈출하였고 이후 그에 대한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로마의 군대는 이백 명을 체포하고 추종자 사백 명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본문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 3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가 감람산에 등장한 것은 자신을 메시아로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천부장은 바울을 애굽 출신 반란자로 추정하였고 그래서 바울을 체포하여 아마도 자신이 포상받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을 것이다.
    
    
    
1. 천부장에게 발언권을 얻는 바울(37~40절)
군인들이 바울을 안토니아 요새의 병영으로 데리고 들어갈 때 바울은 천부장에게 유대 백성에게 직접 말할 수 있는지 묻는다(39절). 바울이 헬라어로 물어보자 놀라서 헬라어를 아는지 묻는다. 천부장은 바울이 사천 명을 데리고 광야로 간 애굽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유창한 헬라어를 구사하는 것을 보고 자기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 바울에게 애굽 출신 반란자가 아닌지 되물었다.
    
바울은 자신이 유명한 도시인 다소의 “시민(폴리테스)”임을 밝힌다. 자신이 애굽 출신의 반란자가 아님을 명확하게 밝힌 것이다. 로마인 천부장은 다소 시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지했을 것이다. 당시 다소는 헬라 문화의 핵심 지역이면서 무역의 중심지였다. 다소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 맞서 황제가 전쟁을 벌일 때 다소 시민들은 황제의 편에 서서 충성을 다하였다. 이것 때문에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는 다소를 자유도시로 인준하고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바울은 자신이 중요 도시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것을 강조하며 로마에 위협을 주는 사람이 아님을 천부장에게 보여주려고 했다. 그리고 동시에 동족을 향해 발언할 기회를 요청한 것이다. 천부장의 허락을 받아 바울은 층대 위에 서서 성전 바깥뜰에 모인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어로 말을 전한다. 22장 1절의 “변명(아폴로기아)”은 변호할 목적으로 전하는 말을 가리킨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어떤 삶에서 회심하게 됐는지 하나님의 계획과 내가 살아가는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을 변증할 준비를 갖춰야 한다. 변증할 기회는 바울의 경우처럼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갑자기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2. 바울의 유대교 시절(22장 1~5절)
유대인들은 바울이 히브리말을 사용하자 조용히 듣는다. 바울은 동족을 향해 자신의 출신, 교육, 신앙에 대해 변증한다. 먼저 그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행 9:11; 21:39). 그리고 예루살렘(3절 이 성)에서 자랐다. 또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에게서 조상들의 율법을 엄격하게 배웠다(행 5:34). 바울은 이를 통해 자신의 유대교 신앙은 디아스포라 유대교가 아닌 팔레스타인(본토) 유대교에 입각하고 있음을 알린다. 특히 가말리엘은 바리새파의 율법 교사였고 산헤드린 공회에 속했으며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을 공격한 유대인들처럼 율법에 열성을 보인 유대인들처럼 자신도 하나님에 대해 열심을 보였다고 증언한다(참조, 롬 10:2; 갈 1:14; 빌 3:4~7).
    
이어서 자신이 율법을 엄격하게 교육받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보인 증거를 제시한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아크리 싸나투)” 자신이 “이 도(그리스도의 복음)”를 박해했음을 고백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이들을 체포해서 옥에 넘겼다. 이 정도 수준의 박해를 했다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모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된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 군중을 향해 자신이 유대교의 고위 관계자들을 알고 있음을 밝힌다. 자신이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다메섹으로 보내는 공문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의 열심을 입증할 수 있는 증인들이라고 밝힌다. 다메섹으로 간 이유도 “이 도”를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서 벌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을 위한 열정과 질투심으로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는데 헌신했기에 자기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유대인에게 있는 열심과 자신의 열심을 비교할 수 있다고 외쳤다(3절). 바울이 이전에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졌으나 그 열심은 바른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바울이 바른 지식을 얻게 되자 박해를 위해 사용하던 열정이 복음을 전하는 열정으로 뒤바뀐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열정도 중요하나 그 방향이 예수의 뜻에 맞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열정이 다른 사람들을 해치게 되고 결국 자신도 망가뜨린다. 성령이 주시는 열정은 사람을 회복하고 살리며 하나님을 향한 열매를 맺게 한다. 그렇기에 열정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열정이 공동체와 이웃을 살리는 방향으로 향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3.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바울(6~11절)
이 단락은 다메섹 경험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이다. 사도행전 9:1~18과 26:13~18과 병행 본문으로 자신의 언어와 관점으로 설명한다. 6절부터는 자신이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됐는지 설명한다(6~16절). 그는 다메섹에 도착할 즘 예수를 만났다. 9:1~18의 내용을 일인칭으로 설명한다.
    
그는 정오 무렵에 하늘로부터 큰 빛을 보았다. 태양이 가장 밝은 시간에 그보다 더 밝은 빛이 비치는 초자연적인 역사였다. 그는 그 빛 때문에 한동안 앞을 볼 수 없었다(11절). 큰 빛을 본 바울은 땅에 쓰러진다. 그리고 생생한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을 듣는다. “사울아, 사울아 내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바울이 되물었다. “주님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다”라는 음성이 들린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의 음성이었다. 예수는 제자들에 대한 박해를 자신에 대한 박해로 여기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와 제자들, 예수와 교회가 동일시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예수는 고난 중에 있는 신자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핍박하는 것이 곧 예수를 공격하는 것이다.
    
다메섹으로 함께 가는 사람들도 바울에게 비친 빛을 보았다. 하지만 예수의 소리는 듣지 못한다. 하지만 사도행전 9:7은 동행하던 사람들이 “소리만 듣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여” 말 못 하고 서 있었다고 기록한다. 이는 동행하던 사람들이 하늘에서 어떤 소리는 들었지만,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그 음성을 듣지 못했다고 묘사한 것이다. 즉, 그들은 그 사건을 목격했으나 바울이 이해한 것처럼 알아들을 수 있는 예수의 음성의 내용은 듣지 못한 것이다.
    
이때 바울은 예수를 “주(퀴리오스)”로 부른다(10절).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부활해서 살아 계시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의 권위로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들인다. 부활하신 예수를 자신이 따라야 할 대상으로 믿는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예수는 바울에게 다메섹으로 가라고 하신다. 그곳에 가면 어떤 사람이 그가 할 모든 것을 알려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바울은 빛 때문에 앞을 볼 수 없었고, 그와 동행하던 자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다.
    
바울은 예수의 음성을 들었지만, 함께 다메섹으로 가던 유대인들은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소리만 들었다. 이는 마치 같은 말씀을 들어도 그 의미를 깨닫는 사람이 있고 그저 지나치는 소리로만 느끼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뜻은 여러 경로와 방법으로 우리에게 들려온다. 단지 소리로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면 이는 큰 은혜중의 은혜이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깨달은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까? 바울과 같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의미 없이 우리를 지나치지 않는다. 우리의 가슴에 머물러 우리의 행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바울은 심하게 맞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여전히 곁에 아무도 변호해 줄 자 없는 위급한 상황에 있었다. 하지만 유창한 “헬라말”로 로마 천부장의 주의를 환기하고, 절제된 표현으로 자신의 민족(유대인)과 출신(큰 성 다소의 시민)을 거론함으로써, 애굽인 반란군 지도자라는 의혹을 벗는 놀라운 기지를 발휘한다. 그러나 그 오해를 푸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좀 더 적극적으로 방금 전까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동족 유대인들을 향해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요청했다(37~39절).
    
*바울은 자기변호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는 말에 마음이 누그러진 천부장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가 동족 유대인들을 향해 발언 기회를 요청한 것이다. 동족인 유대인들은 자신을 죽이려 했지만,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천부장에게 보이고 행한 그의 모습은 복음을 위한 지혜였고, 복음을 위한 용기였으며, 복음을 위한 사랑임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안위를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복음 증거라는 소명에 무서우리만치 철저하게 헌신하는 사도의 모습이 경이롭다. 사나 죽으나, 먹으나 마시나, 오직 주를 위해서(롬 14:8) 라는 그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이를 본받아 어떤 상황에서 나의 삶을 통해 복음이 드러나고 증거되는 삶이어야 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바울의 삶은 오해의 연속이었다. 민족의 반역자요, 모세의 율법을 파괴하는 자요, 성전을 훼방하는 자요, 4천 명의 무장 게릴라를 거느리고 무장 투쟁을 벌이는 반역자가 아니냐는 심문을 당한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만 전했을 뿐이었지만, 세상은 바울을 가장 위험하고 불온하며 질서를 문란케 하는 혼란을 조장하여 체제를 위협하는 자로 저마다의 입장에서 정의하고 낙인을 찍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새겨야 할 모습이다. 복음을 따라 살려는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이 붙여준 다양한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이름들과 평가들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또 복음을 양보하면서까지 그들에게 호의적인 평가를 받으려고 애써서도 안 된다. 복음의 가치와 정체성을 따라 살아내면 된다.
    
-바울은 자신의 이야기로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한다. 유대인들에게 친숙한 히브리 방언(아람어)으로 청중을 “부형들”로 부르며 경청을 유도했다. 정통 유대인으로서 손색이 없는 성장 과정과 가말리엘에게 받은 교육, 그리고 그리스도인을 죽이기까지 율법 준수에 열정적이었던 자신의 지난날을 소개한다. 저주를 받아 죽었다고 생각했던 나무에 달린 자, 곧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의 열심을 당할 만한 유대인은 없었을 것이라고도 알려준다. 그런데 예수를 만남으로 율법과 선민사상에 대한 자기 생각을 뒤집었다.
    
-이 모습이 참 대단하다. 천부장에게는 헬라말을, 유대인들에게는 히브리 방언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에는 매우 놀라운 모습이 있다. 철저하게 청중을 배려하고, 자신을 죽이려는 살기등등한 이들에게 진심 어린 예의를 표하며 경청을 끌어낸 것이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다는 말이 절로 실감 나게 한다. 복음의 내용이 그리스도의 사랑이기에 전하는 방법도, 전하는 사람도 사랑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씀을 묵상하며 바울의 열심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정통 유대인으로서 손색이 없는 자신의 성장 과정과 받은 교육의 결과로 율법과 하나님께 충성하려는 열정이 자연스레 가득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전하는 “이 도(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를 어떻게 핍박했었는지 담담하게 고백한다. 자신은 최선인 줄 알았던 헌신이었는데, 하나님께는 최악의 헌신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서 나의 헌신도 하나님 앞에서 진중하게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주님을 만난 바울의 첫 반응은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였다. 자신이 그동안 핍박해 온 예수님이 자기 주인이 되셨음을 인정한 것이다. 나도 늘 나의 주인 되신 주님께 내 삶을 향한 주님의 목적을 물었는가?, 주님이 그때 들려주신 대답을 따라 살고 있는가!
    
*또 한 가지는 역시 다메섹 사는 길에 비친 하늘의 큰 빛의 은혜다. 무지한 열정으로 치닫던 바울의 걸음을 멈춰 세운 그 빛!, 여전히 교회와 함께 고통 당하시는 주님과의 불현듯 한 만남이 바울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었다. 이처럼 주님은 불현듯 찾아오셔서 내 가치관을 통째로 흔들어놓으셨다. 그때의 이야기가 곧 나의 복음이다. 나는 나의 복음을 불현듯 전할 수 있도록 늘 준비하고 있는가?
    
    
    
*주님, 지금 저의 헌신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열정이 아니기를 구합니다.
*주님, 어느 날 불현듯 내게 찾아오셔서 나를 송두리째 바꾸어 주신 그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날의 주님과 늘 변치 않고 동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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