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공회 앞에서도 담대하게! [행 22:30-23:11]
 – 2024년 06월 20일
– 2024년 06월 20일 –
바울이 천부장이 긴급 소집한(22:30) 산헤드린 공회에서 자신의 소명을 증언하는 내용이다. 바울이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한 것으로 인해 대제사장과의 충돌이 야기된다(1~5절). 바울은 자신이 심문받는 이유가 부활에 관한 쟁점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이번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신학적인 이유에서 크게 충돌한다(6~9절). 예수는 병영에 갇힌 바울 곁에 서서 바울이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함을 알리신다(10~11절).
    
    
    
1. 바울의 증언과 대제사장의 반응(22:30~23:5)
바울의 기소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천부장은 먼저 유대 군중이 격하게 반응한 이유를 파악하려고 한다(22:30). 다음 날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 시민인 사실을 확인하고 바울의 결박을 풀어준다. 그리고 바울을 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세운다. 천부장의 요청을 받은 유대 지도자들은 바울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부각하려 했다. 바울은 공회 앞에 서서 참석자들을 당당하게 바라보면서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러고는 자신이 항상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바울의 행위는 선한 양심에 따른 것이며 유대인들이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바울은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확신했지만, 오히려 그때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지 않은 것이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 하나님의 참된 계시를 깨닫게 되자 이전의 핍박하는 삶이 아니라 그 이후의 고난 받는 삶이 양심에 따른 행위였다고 말한다.
    
그러자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옆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입을 때리라고 명령한다(2절). 주후 47~59년에 대제사장직을 수행한 아나니아는 바울이 하늘의 환상을 통해 계시받았다는 것과 그의 선교 활동이 선한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긴 것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바울은 그런 ‘아나니아’를 “회칠한 담”으로 부르면서 하나님이 그를 치실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 장면은 예수님이 마태복음 23:37~28에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경고하셨던 내용과 연결된다. 아나니아는 자신이 율법을 따라서 심판한다고 하였지만, 바울은 자신을 치라고 하는 것이 곧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꾸짖는다. 바울의 눈에는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킨다고 하는 산헤드린 공회원들, 특히 모세의 자리에 앉은 것처럼 명령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산헤드린 공회는 어떻게 율법을 어겼을까? 먼저 레위기 19:15에 근거하여 법을 어긴 것으로 고소당하더라도 죄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죄인으로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바울이 대제사장을 모욕했다고 주장한다(4절). 그러자 바울은 그가 대제사장인지 몰랐다고 말한다. 이러한 상황은 천부장의 요청으로 모인 비공식 공회였기에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의 의복을 입지 않았을 것이고 바울은 그가 누구인지 식별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대제사장을 모욕하는 행위는 율법을 어기는 것(출 22:28)이었으므로 바울은 자신이 알지 못하고 그런 말을 했노라고 인정한다. 이런 모습은 바울이 율법과 관습을 여전히 존중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한편 본문에서 바울의 분노가 선명하다. 그가 이렇게 분노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판단한다고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들의 위선 때문이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에 분노하셨었다. “위선”은 영광을 얻으려고 경건한 사람처럼 보이는 행동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자신이 잘 알며 순종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태도인, “자기기만”을 포함한다.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은 “자기기만”에 빠져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바울을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모욕하는 사람으로 정죄한다.
    
바울의 이러한 담대한 반응은 위선에 맞서는 용기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위선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얼마나 심각하게 위협하는지 분별하고 위선에 대해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신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지위에 스스로 속지 말고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을 도리어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았는지 늘 점검해야 한다.
    
위선은 신앙공동체의 큰 위협 중 하나인 것을 예수님과 바울의 분노를 통해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심문받는 이유가 “부활”이라고 주장하는 바울(23:6~9)
바울은 모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된 사실을 알고 자신은 바리새인이며, 바리새인의 아들이기에,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 때문에 심문받는다고 외친다.
    
바울은 왜 “부활”이라는 주제를 들고나왔을까?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위험을 피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이후 실로 그렇게 된 것처럼 산헤드린 구성원들의 싸움으로 자신이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을 예상했을 수 있다. 이어지는 재판 과정에서도 바울은 부활을 강조하고(행 24:15, 21; 28:20), 아그립바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때도 부활의 주제를 핵심적으로 언급한다(행 26:6~8, 22~23). 바울은 유대인들의 관심을 “부활”이라는 신학적인 주제로 돌리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서 소명을 받았고, 이 부활의 소망이 바리새 전통의 핵심적인 사상임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 전통에서 부활은 민족의 회복을 상징했고, 후대로 오면서 이 소망은 더욱 강렬해졌다(겔 37:1~14; 단 12:2~3).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들이 기대한 부활이 바로 그들이 죽인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한다. 바울은 구약성경에서 기대한 종말의 부활이 이미 일어났으며,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그 소망을 위해 자신이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 바울은 이처럼 자신이 부활의 소망 때문에 심문을 받는다고 말했기 때문에 로마의 관료들은 그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이 신앙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행 23:28~29).
    
반면 사두개인들은 내세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모세오경, 곧 모세의 가르침에는 부활 사상이 없다고 믿었다. 이런 생각은 사두개인들의 정치적 위치와 연결된다. 핵심적인 위치의 제사장들로 구성된 사두개인들은 성전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기에 성전의 안전을 확보해 주는 로마 제국의 힘에 대해 바리새인들처럼 부정적이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성전이 보존되고 있는 현재의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반면 바리새파 진영의 유대인들은 부활 신앙으로 로마 체제에 항거하면서 목숨을 던지며 싸웠고, 새로운 세상이 열면서 자신들의 죽음이 인정받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부활 신앙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실존과 직결된 것이었기에 이에 논쟁은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바울이 부활을 언급하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싸운다(7절). 사두개인은 부활과 천사와 영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바리새인은 이 모두의 존재를 믿었다. 실제로 바리새인 중에서 몇 명은 바울에게 문제가 없다고 평가한다(8절). 그들은 천사나 영이 바울에게 말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즉, 서기관들은 부활한 예수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바울이 다메섹과 성전에서 천사나 영의 음성을 들은 것일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바울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지만,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명을 받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부활의 예수가 바울을 부르셨기에 부활은 소명의 이유가 된다. 이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에 해당한다. 약속된 메시아이자 구원자이자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하나님이 신원하신 사건이 예수의 부활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다. 교회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해야 한다.
    
    
    
3. 바울 곁에서 말씀하시는 예수(22:10~11).
두 진영 사이에 분쟁이 심해지자, 천부장은 군인들에게 명령해서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도록 한다(10절). 그리고 그날 밤 주님이 바울 곁에 서신다. 11절의 “주”는 바울이 다메섹으로 갈 때 찾아오셨던 부활의 “주”를 가리킨다. 주님은 바울에게 “담대하라(싸르세이)”라고 격려하신다. 바울이 선포한 대로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살아 계셔서 위로하기 위해 그의 곁에 오신다. 예수님은 현재 명령형을 사용하여 계속되는 시련을 겪고 있는 바울에게 용기를 갖도록 격려하신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주의 일을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하게 될 것을 알리신다.
    
“그날 밤에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과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한다(새번역_11절).”
    
주님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증언한 것 같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가 예루살렘에서 지금까지 고난을 겪은 것처럼 로마에서도 고난 가운데 예수에 관한 내용을 증언하게 될 것이라 암시하신다. 이에 바울은 고난의 시기를 거쳐 자신이 로마에서 예수를 증언하게 될 것을 알게 된다. 일찍이 예수는 성전에 있던 바울에게 오셔서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경고하셨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에 세상의 권세에 붙잡히고 말았다. 예루살렘을 거쳐서 로마에 가길 소원했으나 동족에게 얻어맞고 로마 군인들에 의해 구금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바로 옆에서 “담대하라”고 말씀하시고 격려하시며, 로마에서 바울이 증언하게 될 것을 약속하신다.
    
결국 바울은 체포된 몸으로 로마에 가게 될 것이다. 증인 옆에 예수가 계시므로 고난은 섭리의 수단이다. 예수는 증인으로 부르신 사람을 찾아오시고 격려하시고 섭리로 이끌어 가신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 아니고 무엇이 있겠는가?
    
    
    
나는?
-바울은 위기 상황에서 믿음으로 직면한다. 천부장이 공회를 소집하여 정식 재판을 연다. 바울에게 이것 역시 복음을 전할 기회였다. 바울의 담대함은 무슨 일에서든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은 신앙의 양심에서 나왔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일에 자신을 아끼지 않았다. 모든 일, 모든 상황이 그분이 아들 예수를 통해 하신 일을 증거하는 기회로 보였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이 상황에서 성령께서 할 말을 주실 것이라는(마 10:18~20) 약속을 믿었을 것이다.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의 말을 가로막고 입을 치라고 명령하자, 바울은 주저함 없이 그를 위선자(회칠한 담)라 부르고 하나님이 치실 것이라고 선포한다. 의로운 척 재판석에 앉아 있지만 정죄를 받기 전에 불법적으로 때리는 일은 율법을 거스르는 일이요 정의를 남용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양심껏 섬겨온 하나님이 동행하심을 믿으며 환난이 있으리라 미리 말씀해 주셨던 성령이 돕고 계신 줄 믿었기에 바울은 공회를 향해 당당하게 진리를 설파하고 외식과 헛된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종교 권력자들의 의표를 찌르는 발언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복잡한 상황에서도 바울은 매우 지혜롭게 차분히 대응한다. 바울은 부활, 천사, 영에 관하여 공회 안에서 서로 대립하는 두 진영이 있는 줄 알았다. 바울은 자신이 부활의 소망에 관해 말하다가 잡혀 왔다고 그들에게 말한다. 그러자 공회 안의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고, 그 사이에 바울은 무사히 영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복음도 전하면서 환난에서 건짐도 받는 지혜로움이 빛을 발했다.
    
    
*바울이 온갖 고난과 갖은 공격에 담대히 맞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천국 시민으로서 부끄럽지 않았던 그의 신앙 양심(1절)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나의 말과 행동과 선택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질 수 있을 만큼 당당하게 행하고 있을까?
    
*바울은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자신의 입을 치라고 명한 아나니아를 “회칠한 담(위선자)”이라 부르며 담대하게 잘못을 지적한다(2~5절). 또 그가 대제사장인지 몰랐다는 바울의 말은, 율법을 어기는 그가 설마 대제사장인줄 누가 알 수 있겠냐고 비꼬는 듯하다. 특히 자신은 “백성의 지도자를 욕하지 말라”는 말씀을 알고 있기에, 아나니아가 참 대제사장이었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이 곁에 계셔서 그를 강건케 하시니, 바울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고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권력이 두려워 불의에 눈감지 말고 불의에 대해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구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부활, 천사, 영에 관해 서로 의견이 다르다는 점을 이용한다. 바리새인인 바울이 부활 때문에 심문을 받고 있다고 하자, 바리새파는 바울을 두둔하지만, 사두개인들은 반발한다. 이것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기지였으나 동시에 바리새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을 전하기 위한 준비이기도 했다. 바울은 그야말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부활하신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순종했다.
    
*하나님의 계획은 바울을 석방하여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더욱 복음을 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바울이 당한 억울한 구속과 고난은 그를 로마로 데려가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이었음을 알리신다. 이는 분명 당장 풀려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지만, 로마에서의 복음 증거를 꿈꾸던 바울에게 이만한 위로와 소망을 주는 메시지는 없었을 것이다.
    
    
    
*주님, 공회 앞에서 물러섬 없이 담대하게 외치는 바울을 봅니다. 저도 어디에 있든지 담대하게 주의 복음의 스피커가 되겠습니다.
*주님, 저에게도 주님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용기를 북돋아 주실 “담대하라”는 주님의 음성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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