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바울의 변증_억울한 상황에서 기쁜 마음으로[행 24:1-23]
 – 2024년 06월 22일
– 2024년 06월 22일 –
바울을 고발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가이사랴에 도착한 후 벨릭스 앞에서 재판이 진행된다. 바울이 가이사랴에 도착한 지 닷새 만이었다. 대제사장 측의 변호사 더둘로는 총독 앞에서 바울을 기소한다. 하지만 그의 기소는 지나치게 아부적인 발언만 넘쳐날 뿐 바울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벨릭스는 바울에게 자신의 혐의에 대한 해명할 기회를 주고, 이에 바울은 자신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것이지 성전에서 소동을 일으키거나 모임을 소집한 적이 없다며 혐의를 부인한다. 또한 자신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며 만인의 부활과 최종 심판을 믿고 있다며 성전 모독 혐의를 부인한다. 이에 벨릭스는 일단 휴정을 선언한다.
    
    
    
1. 고발당한 바울(1~9절)
바울이 구금된 지 닷새 만에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일부 산헤드린 공회원과 더둘로라 하는 변호사를 데리고 가이사랴에 도착한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대변하여 더둘로가 발언을 시작한다. 그의 발언은 대부분 아부성 발언이었다(3~4절). 5절에서 바울에 대한 기소 내용을 밝히는데, 첫째, 바울은 전염병과 같은 사람이다. 상습적으로 법을 어기며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로 묘사하는데, 데살로니가에서 고발당할 때와 비슷한 내용이었다(행 17:6~7). 둘째, 바울은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선동하는 자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발언하는 듯 들리지만, 그 근거는 매우 빈약하다. 바울이 전도 여행 중에 방문한 도시들에서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소동이 벌어지고는 했지만,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셋째, 바울이 나사렛파의 우두머리라고 고발한다. 벨릭스 총독이 이와 같은 표현을 얼마나 잘 이해했을지는 알 수 없다. 로마인의 시각으로 볼 때 이와 같은 시고 내용은 바울을 단지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조직의 우두머리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더둘로가 기소한 내용 중 가장 중요한 내용은 6절이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더럽히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고발도 단지 소문에 의한 것일 뿐 구체적인 증거를 제사하지 못한다. 일부 사본에서는 6절과 8절 사이에 천부장 루시아를 향한 불만을 표출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래서 우리의 율법대로 재판하려고 했으나 천부장 루시아가 와서 그를 우리 손에서 강제로 빼앗아 갔나이다. 그러고는 그를 고발하는 사람들에게 각하께 가라고 명하였나이다.” 라는 내용이다. 역사적으로는 일부 사실일 수 있어도 사본으로서의 근거는 매우 빈약하여 성경에서 삭제되었다. 왜냐하면 후대 필사자가 본문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하려고 추가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더둘로는 확실히 제시할 만한 증거가 없음에도 자기들의 주장을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인다.
    
    
    
2. 바울의 변론(10~23절)
더둘로의 기소 발언이 끝나자, 벨릭스는 바울에게 변론한 기회를 준다. 바울은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이 된 재판장이 된 것”을 안다고 말한다. 이 표현은 벨릭스가 유대 지방을 통치한 충분한 경험이 있기에 더둘로의 기소 내용을 정확하게 판단할 능력이 있음을 인정한다는 의미도 되겠다. 역사적으로 보면 벨릭스는 주후 52년쯤에 총독으로 임명되어 최소 2~3년이 지난 듯 보인다(27절). 그는 빌라도(주후 26~36년) 이후 가장 오랫동안 재임한 총독이었다(주후 52~60년).
    
바울은 더둘로가 마지막에 기소한 내용부터 변론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온 지 “열이틀밖에” 되지 않음을 밝힌다. 이 기간은 7일간의 나실인의 결례 기간(행 21:27)과 가이사랴로 호송되어 머문 기간인 “닷새(행 24:1)”를 가리킨다. 이렇게 짧은 기간인데 어떻게 소동을 일으킬 수 있겠냐는 것이다. 또한 자신은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하러 올라갔지 집회를 열거나 전도하러 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17절에서 아주 간략하게 자신이 예루살렘 올라온 목적을 밝힌다. 로마서 15:25~32에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 모금한 헌금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올라왔음을 더 자세하게 알려준다. 또한 자기가 성전이나 회당, 또는 거리에서 누구와도 논쟁하거나 소동을 일으킨 적이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면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13절)”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고발한 내용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함을 지적한다. 그들이 고발한 내용에 대하여 전혀 행하지 않았음을 밝힌 것이다.
    
14~16절은 자기가 실제로 믿고 실천한 것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소동을 일으킨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믿음을 신실하게 따르는 유대인임을 강조한다.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을 섬길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믿는다고 고백한다. 이를 통해 자신은 유대 공동체의 법을 범하지 않았다고 천명한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강조한다. 이 소망은 다니엘 12:2~3에 근거하여 자기를 고발하는 유대인들도 동일하게 인정하는 것임을 밝힌다. 바울은 자신도 유대인들처럼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전혀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고 있음을 피력한다. ‘누가’는 바울이 무고한 자를 처벌하려고 애쓰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1~9절)과 정당하게 자신의 무죄를 변호하는 모습(10~21절)을 선명하게 부각한다. 이를 통해 ‘누가’는 독자가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
    
계속해서 자신은 여러 해 동안 유대 지방을 떠났다가 구제 헌금을 전달하려고 성전에 제물을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노라고 말한다. 이 헌금은 이방-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형제들에게 보내는 헌금이었다. 이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시작된 복음이 가져다준 영적 축복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다. 바울은 이 헌금을 모금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것을 자신이 해야 할 중대한 사역의 일부로 여겼음을 그의 서신서를 통해 잘 설명한다.
    
18절은 자신이 성전에서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께 성결 예식을 행하였을 뿐, 다른 어떤 모임이나 소동을 일으킨 적이 없다고 해명한다. 바울이 성전을 더럽혔다는 더둘러의 주장을 정면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로써 자신이 하나님을 모욕한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자임을 천명하였다. 21절에 대한 번역은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 가운데 서서 죽은 자의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너희에게 심판받는다고 말한 것뿐이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22~23절은 바울의 변론을 들은 총독 벨릭스가 유대인들의 기소 건에 대하여 판결을 유보하고 휴정을 선언하는 장면이다. ‘누가’는 벨릭스가 판결을 유보한 이유를 그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라고 설명한다. 어떻게 이렇게 알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러나 벨릭스는 여기서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 없이 바울의 무죄를 선고하고 그를 석방했어야 옳다. 그러나 벨릭스의 판결은 뒤로 미루는 것이었다. 이렇게 결정한 두 가지 이유를 설명한다. 첫째, 천부장 루시아로부터 더 구체적인 보고를 듣기 위해 기다리겠다는 것이고, 둘째, 벨릭스가 기독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어떻게 기독교를 잘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아내 드루실라를 통해 알게 되지 않았을까 추정할 뿐이다.
    
벨릭스의 결정은 겉으로 보기에 그리스도인들의 편을 들거나 최소한 유대인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또한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봐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라고 명령한다. 이는 바울의 구금 상태가 호전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벨릭스가 하는 이후의 행동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벨릭스는 사실 바울을 석방해야 옳다. 그는 정의를 실행하는 것보다 유대인의 눈치를 더 보고 판결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했다.
    
    
    
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이미 불법적으로 바울을 죽이려고 할 만큼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유대인들의 분노를 잠재우고 안정적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의도일 뿐이다. 그들이 바란 것은 자신들의 “진실한 말”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지어서라도 바울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사탄은 교회 공동체를 무너뜨리기 위해 “거짓말”을 “사실”처럼 둔갑시키기 일쑤다. 사탄은 “빛의 천사”로 가장하여 거짓으로 공동체를 이간질하고 성도를 무너뜨리는 것에 최적화되어 있다. 순진하게 이들의 간교에 휘둘리면 안 된다.
    
-더둘로는 총독에게 합당한 예의를 넘어서 아첨하는 말로 마음을 얻으려고 한다. 그의 입에 달린 말과는 달리 벨릭스는 태평이나 선견지명과는 거리가 먼, 포악하고 잔인한 통치자로서 유대인들이 혐오하던 관리였다. 그는 증거를 제시할 수 없는 선동적인 말로 바울을 고소한다. 그는 매우 간교하여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거나 성전을 더럽게 하였다는 종교적인 죄목은 나중에 언급하고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다 소요케하는 전염병과 같은 사람이라는 사회적 죄목을 먼저 언급하며 벨릭스의 우려를 자아내고 감정적으로 자극하였다. 이는 그만큼 바울이 전한 복음이 개인뿐 아니라 우상으로 찌든 사회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음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아첨의 말과 장황한 거짓말로 벨릭스의 환심을 사려 한 더둘로와 달리 바울은 짧지만, 예의를 갖추어 인사한다. 바울은 흥분하지 않고 매우 절제된 언어로 진실에 근거하여 변론을 시작한다. 바울은 성령께서 함께하여 주신다는 것과 현란한 말보다 강한 진실의 힘을 믿었다. 벨릭스가 유대 민족을 여러 해 통치했기에 사건을 공정하게 파악하고 재판해 줄 것을 전한 바울은 자신을 향한 고발에는 뚜렷한 증거가 없음을 밝힌다. 자신은 예루살렘에 겨우 12일 머물렀을 뿐인데 이는 소요를 계획하고 실행하기엔 너무 짧은 기간이며 더군다나 그들은 자신들의 고소 내용에 대한 직접 증인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바울은 자신이 믿고 또 유대인 앞에서 전한 것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 즉 죽은 자의 부활뿐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자신을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부르지만, 사실 자신은 그들과 같은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는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에 전혀 거리낄 것이 없는 개인의 신앙적 확신이 사회를 교란하는 범죄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바울의 변론 자리는 자기변호만이 아니라 또 하나의 복음 증거의 장이었다.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바울은 낡고 후패한 옛 질서의 권력 앞에서나 기성 종교의 권력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다.
    
-바울은 자신은 유대인들의 고소대로 성전을 더럽힌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이 기대하는 결례를 행했고 모임이나 고동 없이 12일 동안 보낸 것을 다들 알고 있다고 했다. 문제는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불법적으로 자신을 붙잡음으로써 생겼으며 그들은 공회에서도 자기 죄를 찾지 못했고 죄가 없기에 총독에게 고소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한다.
    
    
*바울을 암살하려는 계획이 실패하자 이번엔 100km가 넘는 거리를 달려가 분노를 앞세워 바울을 고소한다. 그 먼 거리를 대제사장이 직접 찾아올 만큼 집념이 대단하다. 어둠의 세력들은 예수님을 죽일 때 칼의 힘을 의지했다면, 이번에는 “말”의 힘을 의지한다. 그러나 이것이 통할 리가 없다. 예수님께서 직접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하리라는 약속은 헛된 약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암살 계획에서 보호해 주신 주님은 말로 현혹하는 것에서도 바울의 논리적이고 치밀한 변론의 말로 방어해 주신다.
    
*종교 지도자들은 순전히 종교적인 이유로 바울을 반대하면서도 그를 사회를 교란하는 정치범으로 몰고 있다. 예수님을 죽일 때 쓰던 방식과 다를 바가 없다. 이 땅의 교회를 향한 쓰디쓴 평가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복음의 본질을 모르는 피상적인 평가에 흔들릴 이유는 없다, 오히려 더욱 담대하게 이를 변론해야 함을 바울의 모습에서 깨닫는다.
    
*바울은 조목조목 반박한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성령께서 할 말을 준비해 주신 것이다(눅 12:11~12). 현란한 말보다 강한 것은 진실이다. 함께하시는 성령님의 확신에서 담대함이 나온다.
    
*벨릭스의 간사함이 드러난다. 그는 바울이 믿는 도를 이미 알고 있었고, 또 바울이 무죄하다는 것을 확신했지만, 유대인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또다시 천부장이 올 때까지 선고를 연기한다. 천부장은 총독에게 총독은 다시 천부장에게 판결을 떠넘기는 형국이다. 바울에게 약간의 자유를 주기는 했지만, 그는 공의를 대변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정치적 수완을 통해 자기 지위를 유지하려는 사람일 뿐이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바울은 억울한 일을 당했다. 기막힐 노릇이다. 그런데 바울이 벨릭스 앞에 서서 변론을 시작하면서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그 때에 총독이 바울에게 말하라고 머리를 끄덕이니, 바울이 대답하였다. “총독님께서 여러 해 동안 이 나라의 재판장으로 계신 것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기쁜 마음으로 내가 한 일을 변호하겠습니다(새번역_10절).” “기쁜 마음으로” 변론하겠다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다. 어떻게 이런 마음이 가능할까?
 
*짐작하건데 바울은 자신이 휘말린 일에 대해 억울하다는 감정에 자기 마음을 빼앗기지 않은 것이다. 이런 마음은 그가 전도여행하는 내내 보여진 것이기도 하다.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에서 고린도에서, 그리고 에베소에서 그는 무수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났다. 하지만 그때마다 억울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찬송했다. 기도했다. 어떻게 이런 행동이 가능했을까?
 
*자기의 당한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억울한 고난과 죽음에 비해 억울한 축에 속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이런 바울의 마음과 태도를 늘 잊지 않아야 겠다. 억울한 일을 무시로 접한다. 하지만 이런 것에 내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리하리라.
 
*또 한 가지 추측한다면, 그가 보인 삶의 궤적을 보면 이런 일을 당할 때 그는 늘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는 변론을 진행하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한다. 그래서 그는 기쁜 마음이었으리라. 이런 마음은 나에게도 있어야 할 마음 아닐까?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늘 전할 말을 준비하고, 기회가 열릴 때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전하는 일에 “기쁜 마음”으로 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기회가 비록 표현할 수 없는 억울한 상황 가운데 있더라도 말이다.
     
    
    
*주님, 바울과 함께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확연하게 보입니다. 공회 앞에 서게 될 때, 통치자들 앞에서 설 때 성령께서 할 말을 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이 확연하게 응답이 되고 있음을 봅니다. 고발한 종교 지도자들이나 벨릭스나 바울의 변론 앞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함을 보며 말씀이 응함을 봅니다. 저에게도 성령께서 때에 따라 맞는 말을 하도록 도와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 억울한 상황에서 기쁜 마음으로 직면하는 바울을 본받고 싶습니다. 억울한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십자가를 떠올리며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겠습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선포한 대로 이루어지다 [왕하 7:3-20]

하나님은 나병 환자 넷을 이용하여 사마리아를 전쟁과 기근에서 구하신다. 이로써 엘리사를 통해 예고하신 말씀을 성취하신다. 아람의 군사들은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큰 군대의 소리를 듣고 도망갔다. 이에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