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편협한 이해, 잘못된 전제, 잘못된 당부 [욥 22:1-30]
 – 2023년 11월 28일
– 2023년 11월 28일 –
욥과 친구들 사이에 세 번째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엘리바스가 포문을 연다. 이 부분이 엘리바스의 마지막 발언이다. 이번 발언의 특징은 규범적 지혜의 일반적인 진술에 머물지 않고 욥의 죄를 구체적으로 열거한다. 당연히 엘리바스가 언급하는 욥의 죄는 직접 목겨한 사실이 아니라 인과응보의 원리로 추론한 것이다.
 
엘리바스는 다른 두 친구와 마찬가지로 욥이 죄인이며 큰 죄를 지어 재앙을 받았다고 확신하며 결론을 내린다. 그는 주관적인 판단으로 욥의 잘못을 지적하며 그를 무참하게 정죄한다. 엘리바스는 욥의 결백하다는 주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이웃에 대한 의무를 다 하지 못했으며 하나님께 불경건하였으므로 현재의 고난에 처했다고 일축한다(1~20절).
 
그러므로 욥에게 재앙이 욥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인정하고 회개하여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권고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욥에게 복이 임할 것이다. 욥의 영적인 삶에 변화가 생겨 하나님께 구하고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기며 그들을 도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할 것이다(21~30절).
 
 
 
1.엘리바스의 하나님에 대한 편협한 이해(1~20절)
1~5절은 하나님께서는 높은 하늘에 계신 분이며 모든 존재보다 크신 분이라고 말한다. 엘리바스는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초월적인 존재이기에 욥에게 직접적인 관심이 없다고 일축한다. 그의 말은 마치 하나님의 초월성을 변호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천사들 앞에서 욥의 의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자랑하고 기뻐하시던 모습(1:8; 2:3)을 부정하는 것이다.
 
엘리바스는 욥을 비롯한 사람들이 아무리 의롭고 지혜롭더라도 사실 하나님께 별 유익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지금 욥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욥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그의 큰 죄악 때문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은 욥의 죄는 심판하셔도 욥의 의를 변호하시기 위해 나타나실 분은 절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나 한 사람의 경건과 의로움과 지혜로움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신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실 정도로 나와 내 삶은 하나님께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6~11절에서는 엘리바스가 욥의 고통을 하나님의 심문으로 묘사하는 부분이다. 엘리바스는 법정에서 검사가 피고인들의 죄목을 하나하나 열거하듯이 욥이 한 때 부자로 살았을 때에 가난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압박하고 착취하며 그들에게 무자비했다고 고발한다. 욥이 토지를 지닌 권세 있는 자로서 가난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압박하고 착취하여 그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는 것이다(6~9절). 엘리바스의 이런 시각은 그가 욥의 고난만 보고서 추측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습관적으로 비난을 일삼는 이들은 사실을 똑바로 보지 못할 뿐더러 순전히 추측에 근거하여 사소한 일을 크게 확대하여 거창한 거짓말을 만들어 낸다. 심지어는 입증되지도 않은 잘못된 정보를 조합하여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 
 
 
12~20의 엘리바스는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시고 모든 것을 아시며 악인을 심판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셔서 인간들이 하는 일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말한 욥의 말을 오해하고는 하나님이 자기의 악한 행실을 전혀 모르시는 분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책망한다. 그는 “하나님이 의로움을 돌아보시지 않는다”고 푸념한 욥의 말을(13~14절)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고 말한 악인들의 말(17절)과 동일시 했다. 욥이 옛 악인들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15절), 그도 악인들처럼 멸망당할지 모른다고 위협한다(16, 19, 20절). 엘리바스는 욥의 말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여 그를 정죄하는데 사용한다. 욥을 악인으로 몰아붙이면서 은근히 자신은 의인으로 세우고 있다. 
 
 
 
2.욥에 대한 잘못된 전제, 잘못된 당부(21~30절)
21~30절에서 엘리바스는 다양한 표현을 통해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말한다. 하나과 화해하고(21절),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22절), 전능하신 분을 향해 돌아가고(23절), 물질적인 재산보다 하나님에게서 기쁨을 찾고(24~26절), 기도하며(27절), 다른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관심을 가지라고 권면한다(29~30절).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주시고(21절), 다시 흥하게 하시고(23절), 친히 그의 보배(금과 은)가 되시고(25절),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서원을 다 이루게 하시고(27절), 그가 하는 일마다 다 잘되고 앞길을 형통하게 하시며(28절), 그의 의로움을 통해 다른 죄인들까지 건져주실 것(29~30절)이다.
 
욥의 상황과 연결시키지 않는다면 엘리바스의 말은 “회개 교과서”라고 할만큼 한 치도 틀리지 않는다. 문제는 이 말이 죄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죄 없는 욥을 향한 말이었다는 데 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3가지를 당부한 것이다.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라”, “전능자에게 돌아가라”. 그는 욥이 하나님께 큰 죄를 지어 관계가 무너졌으니 이제 화해하고 깨어진 마음의 평화를 다시 찾으라고 조언한 것이다. 그러면 예전에 누렸던 “복” 즉, 경제적인 번성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 죄를 보지 못하실 것이라는 생각에 갇혀 살지 말고 늘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경청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라고 당부한다. 무엇보다 악인들의 길에서 돌이켜 불의를 멀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라고 촉구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욥과 그의 가정을 “지으실 것”이라고 말한다. 예전처럼 건강도, 재산도 회복할 것이라는 뜻이다. 특히 욥의 문제를 하나님보다 재물에 더 마음을 둔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고 그들의 가산을 빼앗았을 것이라고 짐작한 것이다. 엘리바스는 욥을 완벽한 죄인으로 전제하고 마음과 실천을 포함한 철저한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엘리바스의 말대로 욥이 교만한 죄인이었다면 그의 충고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을 만큼 맞는 말이다. 오늘날 교만한 죄인이 엘리바스의 말을 듣는다면 전능자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진심으로 회개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욥의 입장에서 듣는다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위로와 충고라는 이름으로 회개를 명령하는 그의 성급하고 일방적인 태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직시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엘리바스의 충고는 기본적으로 욥이 심각한 범죄를 범한 악인이며(5절), 욥의 최대의 관심이 그의 재산을 되찾는 것이라는(21, 24, 25절) 전제를 가진 말이다. 이러한 잘못된 전제는 그의 지혜로운 충고를 “욥이 복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했던 사탄의 고발(1:9~11)과 비슷한 것이다.
 
-욥의 고민은 잃어버린 재산이나 자녀들이나 건강이 아니었다. 의로운 자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없이는 불특정한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이전처럼 회복하는 것은 욥에게 무의미한 것이었다. 오히려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우습게 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지혜로운 말일지라도 고난 당하는 지체에게 함부로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을 삼가해야 한다. 고난 당하는 자에게 진정한 위로는 그의 곁에 있으면서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다. 그 자신보다 더 빨리 그의 고난의 이유를 말하고, 취할 행동과 품어야 할 마음을 정해주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 문제를 진단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 최선일 때가 많다. 그런데 본문의 엘리바스는 자신과 친구들의 충고와 권면을 수용하지 않는 욥에게 격앙되어 직접적으로 “네 죄악이 끝이 없다”고 돌직구를 날린다. 엘리바스에게 고난 당하는 욥은 위로가 필요할 친구가 아니라 회개를 종용해야 할 친구였던 것이다.
 
-이런 엘리바스의 모습은 하나님에 대한 편협한 이해와 욥의 고난에 대한 섣부른 판단과 욥의 하나님을 향한 태도에 대한 섣부른 판단으로 이어졌다.
 
 
*욥기 문맥 안에서는 욥을 향한 엘리바스의 말은 그야말로 선부른 판단이고, 자기 판단에 옳다고만 생각하며, 친구의 결백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태도에서 나온 말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엘리바스의 회개의 요청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잘 정리된 “회개 신학”이기도 하다.
 
*욥이 이렇게 자기 죄를 인정하고 악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 욥 개인의 삶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시고 그에게서 돌렸던 얼굴을 그에게로 들 것이며, 욥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또 욥이 가는 길을 막았던 흑암이 이제 빛으로 바뀌어 그의 길을 비춰줄 것이라고 약속해 준다. 욥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 그를 낮추시는 것을 수용하며 자신의 교만을 인정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겸손해진 욥을 높이시고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정결하게 된 욥은 다른 사람들까지도 회개로 이끌 수 있게 될 것이라고도 한다. 
 
 
*엘리바스가 격노하고 있다. 위로하러 온 그가 역정을 내는 것이다. 질문하고 질문하며 명령하고 명령한다. 엘리바스의 질문은 몰라서 하는 질문이 아니라 욥을 공격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질문에 이미 답이 들어있다. 한 수 가르치는 것이다. 문제는 욥의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서 하는 가르침이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현상에 근거하여 추측한 것으로 하는 가르침이다. 욥이 이런 저런 죄를 지었다고 나열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범할 수 있는 가장 흔한 실수다. 보이는 현상 만으로 추측하여 일반적인 지식으로 단정하는 것이다. 전혀 공감되지 않은 메마른 지식만을 전할 뿐 아니라 그 말이 칼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욥기를 묵상하며 나는 더 괴롭다. 욥의 몸부림을 읽으며 괴롭고 친구들의 말로 난도질하는 것이 괴롭다. 괴로운 이유는 분명하다. 나도 말로 난도질 했었고 앞으로도 할 수 있으니 괴롭지 않을 수 없다.
 
*엘리바스가 회개의 교과서라 불릴 만큼 명쾌하게 회개를 명령한다. 그런데 곰곰히 살펴보면 매우 맞는 말인데 매우 거북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명령은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모든 회개 명령이 이런 식이다. 질문에 담긴 전제와 다를 바 없다. 우리의 흔한 어법이 아닌가!
 
*엘리바스의 질문들과 명령들 속에 내 음성이 들린다… 쏘아붙이는 일방적인 말의 폭력이 새삼 선명하게 돋보인다. 나의 입이 이렇게도 미숙했음을 깨달으니 괴롭다. 내가 엘리바스처럼 말해왔다. 그리고 말하고 있다.
 
 
 
*주님, 혹 저도 주님에 대해 편협한 이해, 특정인에 대한 잘못된 전제에 따른 당부를 당연한 듯 하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겠습니다. “삼사일언(三思一言)의 격언을 새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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