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배척당하셔도 두루 전하시다 [막 6:1-13]
 – 2024년 02월 23일
– 2024년 02월 23일 –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후에 주님은 고향 나사렛에 돌아오신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다른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과 달랐다. 주님은 자기 고향 땅에서 능력을 베풀지 않으셨는데, 이를 통해서도 주님의 사역에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또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위임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한 주님의 사명과 그의 제자들 사명 사이에는 밀접한 병행 관계가 존재한다. 즉, 주님께서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받으신 것처럼 장차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사람들의 배척을 받게 될 것을 암시한다.

 

 

 

  1. 나사렛에서 능력을 행치 않으시는 주님(1~6절)

주님의 고향은 나사렛이다. 눅 4:16~30에서는 이를 분명하게 밝혀준다. 주님은 고향 나사렛에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말씀을 들으려고 왔던 무리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들은 주님께서 지혜로 가르치심과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주님의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먼저 고향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주님의 가르침이나 기적을 베푸시는 능력이 아니었다. 주님의 가정 배경이었다. 마태는 ‘목수의 아들’로 마가는 주님을 ‘목수’로 표현하였다. 두 복음서를 취합해 보면 주님은 요셉과 더불어 목수 일을 같이한 것으로 판단된다. 주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의 지혜와 능력에 놀라운 반응을 보이기는 했으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고향 사람들은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주님을 “배척했다.” 이 단어는 긍정적인 믿음의 반응에 대한 반대 의미이다. 이를 평범한 속담을 통해 표현하신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받지 않음이 없다.” 이 속담의 의미는 선지자가 자기 고향 외에는 어디서든지 존경을 받는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주님은 자기 고향 외에서도 배척을 경험하셨다. 이 말의 의미는 혹 다른 곳에서 존경받던 선지자라도 고향에서는 존경받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다. 특히 “자기 집”이라는 주님의 표현 속에서 어머니 마리아는 예외겠지만, 주님의 다른 가족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마가는 마태와는 달리 주님께서 그들의 믿음 없음에 놀라셨다고 언급하고 또한 거기서 어떤 권능도 행할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마가는 고향 사람들의 믿음 없음과 많은 능력을 행치 않으심을 연결하여 설명한다. 주님의 능력은 마술적이거나 기계적인 것은 아니다. 마가는 지속적인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주님이 나사렛에서의 이적을 거의 행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주님께 병 고침을 받으러 찾아온 사람은 극히 적었음을 깨닫게 해준다. 주님께서 능력을 아무렇게나 사용하지 않으셨기에 고향에서 능력을 나타내지 않으신 것이다.

 

 

 

  1. 열두 제자의 파송(7-13절)

주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부르신다(7절). 다만 그들을 선발하시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사명을 위임하시는 이야기이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게 하려고 파송하는데,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신할 새로운 언약공동체가 주님에 의해서 파송된 이들 열두 명의 제자들을 통해서 만들어질 것을 암시한다.

 

귀신을 제압하는 권세는 주님의 권세였고, 하나님 나라가 사탄의 통치를 궤멸하는 권세임을 나타낸다. 주님께서는 이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다.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사탄의 통치 세력을 제압하신 것처럼 제자들이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통해서도 사탄의 통치 세력은 제압당하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선교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금지해야 할 것을 나열하신다(8~9절). 마태와 마가의 목록은 지팡이 지참에서만 차이가 있다. 마가는 이미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그들이 여행할 때 가지고 가는 것을 허락하는 차원이고 마태는 여행을 위해 지팡이를 사는 것을 금지하신 것으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두 벌 옷’을 갖지 말라는 것도 여분의 옷을 말하는 것이나 아니면 야외에서 밤을 보내야 할 때 보온을 위해 덮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금지하는 목록을 굳이 나열하신 목적은 제자들이 이 선교여행을 떠나는 시점에서 그 상태 그대로 떠날 수밖에 없고 그만큼 선교는 급박한 사명인 것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신의 필요를 위해 섬세하고 세밀하며 치밀한 준비를 요구하지 않고 심지어 허락하지도 않을 만큼 선교가 긴급한 사명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금지 명령들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준비하지 않아도 다른 방법을 통해 필요한 것들이 공급되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님은 이를 자세하게 풀어주신다. 제자들이 그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을 현장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10~11절). 일반적으로는 제자들의 메시지를 듣는 사람을 통해 공급될 것이다. 숙박문화가 거의 발달하지 않은 당시의 선교사역은 이러한 환대에 대한 기본적인 기대가 있었고 반대로 의무도 있었다. 구약성경에서도 근동 문화권에서는 생면부지의 손님도 공급과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창 18:1~8; 19:1~8; 삿 19:15~24).

 

또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복음과 이를 전하는 제자들이 환영받을 수도 있지만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예상하고 계셨다. 복음을 듣는 반응에 따라 사람들 사이에 분리가 일어날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이 이 상황에 대해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지 말 것을 분명하게 하신다.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려서 증거로 삼아라.”라는 행위는 당시 근동지역에서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 지역에서는 여전히 거부를 나타내는 극적인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는 그 마을 하나님 나라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상징적인 행동이다. 제자들의 이러한 행위를 통해 그곳 주민들을 향한 경고의 기능뿐 아니라 마지막 심판 때 그들에 대한 심판의 증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주님처럼 “회개”를 선포했다. 귀신을 내쫓고 병자들을 고쳐주었다(12~13절). 이와같은 기록은 주님의 사역과 제자들의 사역이 연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 준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그 사역은 말씀 선포, 귀신 축출,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 등으로 구성된다.

 

 

 

나는?

-주님은 가장 가까운 이웃과 친척에게서 배척받으셨다(1~3절). 주님의 가르침과 권능은 사람의 지혜와 능력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교훈이었으나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 때문에 주님을 배척한다. 주님의 출신과 직업, 가족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익숙함이 주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방해한 것이다. 그래서 가장 환영해야 할 가족과 친척, 고향 사람들이 주님을 냉대하며 배척한 것이다.

 

-믿어야 할 이유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믿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는 데만 골몰했기 때문이다. 믿기지 않아서라기보다 믿고 싶지 않은 것이다. 선입견이 이렇게 무섭다. 지금 우리 공동체는 어떨까? 살아온 여러 환경에서 축적된 선입견과 안목으로 서로를 바라보면 치명적인 선입견을 품고 서로를 대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예수님처럼 서로를 바라보고, 이해하며 용납하는 공동체이기를 꿈꿔본다.

 

 

-믿지 않은 고향 사람들에게는 아무 능력도 행하지 않으셨다(4~6절).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나사렛 사람들은 주님을 향해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여기서도 행하라고 조롱한 듯 보인다(눅 4:23). 이들을 바라보시면서 그들에게 믿음 없음을 이상히 여기시고 능력을 행하지 않으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말씀의 능력은 오직 말씀을 듣고 반응하는 자들의 삶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5:34, 36). 말씀을 들을 때마다, 믿음의 반응을 주저하지 않아야겠다. 먼저 믿음으로 고백하고 일상에서 의지로 살아내야겠다.

 

-주님은 믿음이 있는 곳에서만 역사를 만들어 내신다. 고향 아나돗에서 환영받지 못한 예레미야 선지자처럼(렘 11:21) 믿음 없는 고향 나사렛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다른 마을로 돌리셨다. 믿음이 없는 곳에는 치유도 없다. 능력도 드러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므로 일어나는 새 창조도 없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열두 제자들을 파송하셨다(7~13절). 주님은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전도자가 갖춰야 할 것들을 소상하게 일러주신다. 전도자의 간소한 복장과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는’ 상징적인 행위는 제자들이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이 삶과 죽음의 양자택일을 결정하는 엄중한 선포임을 드러낸다. 또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사명이 얼마나 막중한지를 보여준다.

 

-주님은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 복음 전도 여행에 보내시면서 의지할 동료와 귀신 쫓아내는 권능을 주셨다. 그러고는 양식, 주머니, 동전, 두 벌 옷 등 여행 필수품마저 챙기지 못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하신 의도를 따라 살아야 하겠다.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은 어떤 일보다 긴급한 사역임을 알고 늘 전해야겠다. 이 와중에 하나님 나라 복음만 전해도 환대해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거절당해도 주님께서 기억하심을 믿기에 좌절하지 않으리라.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파송하신 곳은 어디일까? 가정과 삶 기업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을까? 하나님 복음을 긴급하고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을까?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배워야 한다. 주님은 말씀 선포와 능력을 행하심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보이셨다. 따라서 말씀에 주목하고, 주님의 행적을 주의 깊게 살폈다면, 주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고향의 가족과 친지들, 사람들은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보지 않고, “목수의 아들, 예수”라는 선입견에 함몰됐다. 그 안목에 사로잡혀 메시아를 거절한다(요 1:46; 7:52).

 

*나는 기록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며,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나의 경험과 지식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고 있을까? 내가 듣고 배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쌓인 주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혹시 주님을 주님답게 알아보지 못하게 하고 있지는 않을까?

 

 

*사람들은 배척했으나 주님은 계속해서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신다. 제자들을 부르셔서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신다.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도 주셨다. 세상을 놀라게 하고 인기몰이할 권능이 아니다. 상하고 찢긴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도록 주신 권능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고 하늘의 안식으로 백성들을 초청하라고 주신 권능이다.

 

*여행을 위해 많은 것을 소유하지 말라는 당부는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믿으라는 요청임을 안다. 영접하는 자의 집에 있으며 복음을 전해야 하고, 배척하면 거기서 나갈 때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증거를 삼으라고 하셨다. 이를 통해 마지막 때가 임하였고, 그 나라를 거부하는 자에게 얼마나 혹독한 심판이 있을지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혹 귀신을 제어할 권능이 없을지라도, 사랑의 증거와 능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손을 얹어 병을 고치는 권능은 없을지라도 죽음의 권세를 영원히 끝낼 수 있는 부활의 복음이 있다. 작은 것이라도 나눌 수 있는 사랑의 힘과 위로의 복음도 있다. 평안의 말씀과 다시 오실 주님의 약속과 소망이 있다.

 

*지팡이 외에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복음을 전하고 복음으로 살아가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야 한다. 구원 얻는 복음에 대해 확신해야 할 것이다. 스승이 되신 주님께서도 배척당하셨는데, 제자들이 배척받지 않을 리 없다. 그럼에도 두루 촌에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가르치셨던 주님을 기억하고 따라야 한다.

 

*이 세상은 여전히 구원의 손길이 와 닿기를 고대하는 고달픈 인생들이 있고, 어둠의 권세로부터 그들을 어서 건져내라고 권능의 증인으로 세우셔서 우리를 파송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주님, 배척받으신 주님을 기억하며, 언제든지 배척받을 수 있음을 알기에 더욱 담대하게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주님, 그저 열두 제자들에게 주신 권능을 바라보면, 네게도 목양의 현장에 주님께서 주실 권능을 사모하게 됩니다. 제게도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권능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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