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예루살렘을 향한 진지한 여정_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따라 [행 20:17-27]
 – 2024년 06월 14일
– 2024년 06월 14일 –
밀레도에 있는 바울이 에베소에 사람을 보내 장로들을 초청하고 그들에게 고별 설교를 전한다. 바울은 장로들에게 어떻게 에베소 교회를 섬겼는지 설명하면서 자신의 목회여정을 모본으로 삼도록 가르친다(17~21절).이어서 바울은 고난이 있더라도 예루살렘으로 가야하는 목표를 설명하고(22~24절), 다시 한 번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회고한다(25~27절).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육상 경기의 언어로 정의한다. 그가 달려갈 “길(드로모스)”은 경기장에서 선수가 완주해야 하는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의 목표 거리, 즉 “코스”를 가리킨다. 당시 육상 경기 코스는 대략 160~190m이었다고 전해진다. 은유적으로 주의 종이 달려가는 목적지, 인생의 목표를 의미한다. 운동선수가 목표 지점까지 완주하려면 고통을 견뎌내야 하듯이 바울도 자신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세로 사명을 “마치는 것(텔레이오사이)”을 다짐한다. 그의 다짐대로 예루살렘에 고난이 있더라도 경주를 포기하지 않고 로마까지 완주할 것을 결심한 것이다(행 19:21).
 
 
 
1. 에베소에서의 목회를 회고하는 바울(17~21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에베소에 들르면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길 수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배가출항하기까지 남은 시간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서 권면하려는 계획을 세운다(17절). 이를 위해 동역자 중 한 명을 에베소로 보냈다. 당시 장로들의 주된 역할은 교회를 목양하고 진리에 따라 성도들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자신이 아시아 지역에 도착한 첫날부터 어떤 태도로 목회했는지를 장로들에게 상기 시킨다. 
 
19절은 종으로서 주를 섬긴 것을 강조한다. “종으로서의 사역”은 주님이 보여주신 삶이었다. 바울은 종으로서 복음을 증언하는 일(행 20:24)과 동료들의 필요를 채우는 섬김의 일(행 20:34)을 하였다. 바울의 섬기는 삶은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났다. 곧 겸손과 눈물과 시험을 견디는 것이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시험으로 생긴 시련을 겪으면서 처음부터 겸손과 눈물로 주를 섬겼다(행 13:50; 14:2~7, 19; 17:5~9, 13; 18:6, 12~17; 19:9; 20:3).
 
이렇게 바울은 섬기는 삶의 방식으로 헌신적으로 “유익한 것”을 교회에 가르쳤다(20절). 복음이 주는 유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그 가운데서 예수를 믿는 자들의 죄가 용서함을 받고,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며, 다가올 심판에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복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따라 살도록 인도하기 때문에 거룩하지 않은 세상에서 거룩한 인생을 살도록 돕기에 유익하다. 바울은 이렇게 유익한 복음을 “침묵하지 않고 담대하게 있는 그대로 전하였다.” 기독교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장로들은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복음의 진리를 희석시킬 위험성이 있었다(고전 2:17; 4:2~5; 갈 4:16). 
 
바울은 20절에서 공개적인 장소와 가정에서 물러서지 않고 담대히 전하고 가르친 “유익한 것”이 21절을 통해 “회개와 믿음”임을 밝힌다. 회개는 방향의 전환, 즉 돌이키는 것을 의미하기에 떠나야 할 대상이 있고 돌아가야 할 대상이 있다.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바울은 특히 회개를 하나님을 향한 것으로(개역개정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대상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밝힌다. 회개는 의존하던 것에서 돌아서서 예수께로 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적대적인 방향(우상)에서 돌아선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을 향해 돌아와야 하고 이방인들은 그들이 섬기던 신들에서 참 하나님을 향해 돌이켜야 한다. 바울은 이와 같은 메시지(회개와 믿음)를 성도들이 모인 가정과 믿지 않는 자들이 모이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전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곧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마다 각기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그래서 복음이 진정으로 유익한 것이라고 가르치려면 겸손과 눈물과 시험을 견디는 것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ㅗ이의 것이 유익한 줄 알고 그런 것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언제나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유익한 것은 예수 믿는 일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또한 신자들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으로부터 계속해서 돌이켜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와 믿음은 성도들에게 불변의 명령이다.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관심은 언제나 진정으로 유익한 것을 겸손과 눈물과 참음으로 가르치는 것에 있어야 한다. 
 
 
 
2. 예루살렘에 있게 될 바울(22~24절)
바울은 성령이 인도하시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한다(21:4, 11). “매다, 사로잡다, 묶다”등의 뜻인 “데오”의 수동태를 사용해서 자신의 계획과 뜻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는 것임을 표현한다. 아울러 “데데메노스(완료형)”을 사용하여 성령의 뜻이 이미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성령의 뜻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향하지만 그곳에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고 말한다(22절). 투옥되고 환난을 겪게 되는 것(23절)은 분명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한다. 
 
자신의 관심사는 자신의 목숨이 아니다. 운동장의 육상 선수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코스를 완주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고난이 있다고 해서 경주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끝내 로마까지 완주할 것을 결심한다(19:21). 자신이 이 사명을 예수께로부터 받았다고 증언한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의 종으로서 주님의 사명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고 이 사명을 마치는 것이 자신의 일임을 자각하고 있다. 바울은 마치 예수님께 소속된 육상 선수와 같다. 
 
바울은 자신의 목표, 곧 예수께 받은 사명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를 통해 죄를 용서받게 되고 새 생명을 얻게 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은혜이며, 복음의 핵심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인생이란 내 계획을 단순히 성령이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내가 순종하는 것이다. 내 계획대로 잘 풀리지 않거나 난관을 만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믿는 자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조바심을 내며 묻지 않는다. 오히려 고난과 역경이 찾아오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코스를 완주할 용기를 주시도록 기도한다. 
 
 
 
3. 과거 사역에 대한 확신(25~27절)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그 나라”, 즉 하나님 나라를 전파한 것으로 요약된다(행 19:8; 28:23, 31). 복음이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소식이다(사 52:7).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 곧 하나님 나라를 전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바울은 에베소 목회에서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깨끗하다고 말한다. 이 표현은 에베소에서 영적으로 (영원히) 죽은 자들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자신을 에스겔 3:17~21에 있는 파수꾼과 같다고 생각한다. 만일 백성에게 경고하지 않아서 악인이 죄악 중에서 죽게 된다면 선지자는 악인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겔 3:18). 하지만 파수꾼이 악한 자들에게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악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다가올 심판의 위험을 알려야 하는 영적인 파수꾼이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뜻(계획)을 물러서지 않고 전했다(27절). 만일 에베소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 심판을 받는 운명에 처한다면 그것은 바울의 책임이 아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 나라, 즉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을 신실하게 수행했음을 확신한다. 파수꾼의 역할은 하나님 나라(25절), 즉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소식(=복음)을 물러서지 않고(27절) 증언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소식만이 개인과 사회의 유일한 소망임을 담대히 전하지 않는 교회와 복음의 일꾼들에게 하나님은 책임을 물으신다. 복음 아닌 것에 의존하거나 그런 것을 열심히 가르치는 사람들이 받을 책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바울은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싶었기에(20:16), 에베소 성도들을 목전에 두고도 방문하지 않기로 한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기에 장로들만이라도 밀레도에 오게하여 교제한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닥칠 어려움을 대비하게 하고 그들을 향한 진심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바울은 겸손과 눈물의 목회자였다. 유대인의 간교한 술책과 폭력과 비방을 참아가며 에베소 교회를 개척했다. 성도들이 증인이었다. 공중 앞에서나 집에서나 유익한 것이면 거리낌 없이 전하고 가르쳤다. 편애하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을 훔치려고 듣기 좋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진실을 왜곡하지도 않았다. 사심을 가지고 접근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았다. 
 
-그런 바울이 전한 가르침의 내용은 회개와 믿음이었다. 하나님 나라였다. 하나님이 보내신 왕 예수를 영접하고 그분의 통치 앞에 복종하라고 요구했다. 내안의 나의 나라가 무너지지 않고서는 절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서지 못한다고 가르쳤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고 두 나라에 동시에 충성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바울의 메시지에는 타협이라는 것이 없었다. 
 
-성령을 통해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난이 닥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겠다고 한다. 거기에도 은혜의 복음을 들어야 할 자들이 있고 죽어 마땅한 자신은 그 사명을 위해 새 생명을 덤으로 받았으니 그 사명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한들 아깝지 않다고 한다. 또한 선지자의 사명에도 충성하였다. 구원의 축복도 전하고 준엄한 심판도 전했다. 주저하지 않았고 더하거나 빼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뜻은 다 전했다. 그들이 원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그들이 들어야 할 메시아를 전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길, 고난과 환난이 기다리는 길, 그러나 어떤 고난일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길, 바울은 그 길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알 수 없는 길을 떠나는 마음이 어땠을까? “보십시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에 가는 길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새번역_22절)”
 
*성령에 매여 가는 길은 무슨 일이 닥칠지 알 수 없는 길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예측 가능한 길을 가고자 한다. 그 길이 안전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안전하다고 여기는 그 길은 복음의 동력을 잃어가는 길이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이 담담하게 고백하는 것은 “성령에 매여”이다. 알 수 없는 길을 가지만, 그 길은 성령이 단단히 매여있는 길이었다.
 
*내가 예측할 수 있어서 나의 방법과 준비가 철저하게 될 수 있는 일보다., 알 수 없지만 성령이 단단히 매여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복음 전도자의 길이 아니겠는가! 목회의 여정이 내가 예측 가능한 길이라면 그것은 나의 길이 되겠지만, 성령에 매여 알 수 없는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길이라면 복음의 길, 능력의 길이지 않겠는가!
 
 
 
 
 
*주님, 바울은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여정도 철저하게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겠습니다.
*주님, 겸손과 눈물로 사역했노라고 고백하는 바울의 모습에 숙연해집니다. 저도 사역을 마치면서 이렇게 진실하고 담담하게 이 고백을 하고 싶습니다. 
*주님, 자신의 생명을 덤으로 받았으니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목숨을 다한들 아깝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나의 목회 여정도 이와 같기를 간절히 소원해 봅니다. 
*주님, 성령에 매여 가는 길, 그 길에서 어떤 일을 만날 지 알 수 없지만, 이 길을 걷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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